[백성호의 예수뎐]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7장 7~8절)
![종교는 늘 두 가지 길로 갈라질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기복종교이고, 또 하나는 영성의 종교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19/3404343b-9d86-4ee6-9715-8e6d8645084d.jpg)
종교는 늘 두 가지 길로 갈라질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기복종교이고, 또 하나는 영성의 종교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중앙포토]
마술 같은 소리가 아닌가. 청하면 받는다니, 찾기만 해도 얻는다니, 문을 두드리기만 해도 열린다니 말이다. 한마디로 ‘도깨비방망이’다. “금 나와라! 뚝딱!” 하고 땅바닥을 두드리기만 해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은 나와라! 뚝딱!” 하고 내려치기만 해도 바라는 대로 우수수 쏟아진다. 그런 종교라면 “믿습니다!” 한마디에 온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갈 것이다.
(41)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욕망의 종교인가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다소 위험하다. 왜일까. ‘왜곡의 지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다. 네가 하는 사업도 번창할 것이고, 자식의 대입 수능도 문제없을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심어준다. 그렇기에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를 ‘강력한 기복 종교’로 탈바꿈시키는 성경적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게 설교하는 목회자도 있고, 그렇게 믿는 신자들도 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고개 들지 않을 욕망이 있을까. 이 말을 듣고서 청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청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앞에서 자기 안의 욕망을 청한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나는 물음이 올라온다.
‘그리스도교는 영성의 종교인가, 아니면 욕망의 종교인가?’
![성경에는 예수가 눈 먼 사람이 앞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적의 일화도 녹아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앞을 본다는 이야기에 담긴 깊은 뜻은 어떤 걸까.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19/11a27413-79fb-479a-a064-69b45525bf14.jpg)
성경에는 예수가 눈 먼 사람이 앞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적의 일화도 녹아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앞을 본다는 이야기에 담긴 깊은 뜻은 어떤 걸까. [중앙포토]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에고를 키우는 길이고, 다른 쪽은 에고를 치우는 길이다. 한쪽은 ‘나의 뜻’을 따르는 길이고, 다른 쪽은 자신의 뜻이 무너진 곳으로 드러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길이다. 예수는 후자를 따랐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채 그 길을 따랐다.
그러니 예수가 설한 그리스도교는 ‘욕망의 종교’가 아니라 ‘영성의 종교’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길이 싫은 걸까. 왜 자꾸만 거꾸로 가고 싶은 걸까. 어째서 ‘영성의 종교’가 아니라 ‘욕망의 종교’를 따르고 싶은 것일까.
‘욕망의 눈’으로 보면 성경 전체가 ‘도깨비방망이’이다. 하지만 그 눈을 허물고 보면 다르게 보인다. 성경은 과학이다. 자기 자신과 인간과 세상과 우주의 존재 원리에 대해 설명하는 깊은 과학이다. 예수는 온갖 비유를 들어 그 속에 흐르는 이치를 풀어놓았다. 그런 비유들이 우리가 가진 ‘욕망의 눈’을 관통하며 왜곡될 때 문제가 된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던 예수의 기도가 우리의 눈을 통과하면서 “아버지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가 되고 만다.
2000년 전에도 숱한 이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몸이 아픈 이도 있고, 마음이 아픈 이도 있었다. 삶에 대한 물음을 도무지 풀지 못해 찾아온 이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예수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또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는다”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게 아니다”라며 ‘기복적 태도’를 신랄하게 공격했던 예수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예수가 말한 청함과 두드림에는 어떤 뜻이 숨어 있을까.
![숱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기 삶의 문제를 물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의 눈으로 해법을 내놓았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19/fc6fa70d-c9bd-4a57-91f8-44dee552d8f0.jpg)
숱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기 삶의 문제를 물었다. 예수는 그들에게 하늘의 눈으로 해법을 내놓았다. [중앙포토]
불교의 『금강경』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있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여기서 ‘머무름’은 집착을 말한다.
가령 어제 점심때 억울하고 불쾌한 일을 당했다고 하자. 하루가 지났지만, 자꾸만 생각난다. 어제 일은 시간과 함께 이미 흘러가 버렸는데도 자꾸 떠오른다. 왜 그럴까. 내 마음이 ‘그일’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끈적끈적한 접착제를 바른 채 ‘그일’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마음이 흘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문다.
무언가 청하는 일. 무언가 찾는 일. 간절하게 문을 두드리는 일. 그 모두가 ‘마음을 내는 일(生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신의 마음을 향해 내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렇게 일으킨 마음이 신의 마음으로 흘러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다. 우리는 그렇게 청하고, 그렇게 찾고, 그렇게 문을 두드린다.
![갈릴히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의 유적지. 예수는 이 일대에 머물며 설교를 다녔다고 한다.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19/34611880-bffa-4ee2-9319-1d92d9e7145f.jpg)
갈릴히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의 유적지. 예수는 이 일대에 머물며 설교를 다녔다고 한다. [중앙포토]
그런데 기도할 때 ‘착(着)’이 생기면 어찌 될까. 애착이든 집착이든 말이다. 그러면 브레이크가 걸린다. 자신이 아무리 마음을 일으켜도 ‘접착제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붓다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고 했다. 그 구절 앞에 ‘마땅히’라는 말까지 넣었다. 붓다는 왜 그 말을 넣었을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라는 대목 앞에 왜 ‘마땅히’라는 단어를 굳이 집어넣었을까.
그게 이치이기 때문이다. 빗방울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 지지 않는다. 강물도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아래에서 위로 역류하지 않는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낙엽이 진다. 그것이 이치다. 인간과 세상과 우주를 관통하는 신의 섭리다.
![노을 지는 갈릴리 호수 위를 새들이 날아가고 있다. 2000년 전 예수도 똑같은 풍경을 보지 않았을까. [중앙포토]](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203/19/6c2daec2-c1b1-4363-adac-cd618d7f5e3a.jpg)
노을 지는 갈릴리 호수 위를 새들이 날아가고 있다. 2000년 전 예수도 똑같은 풍경을 보지 않았을까. [중앙포토]
이와 마찬가지다. 붙들고 있으면 마음이 흐를 수가 없다. 붙들지 않을 때 마음이 흘러간다. 그렇게 흘러야 건너갈 수 있다. 내 마음에서 신의 마음으로 건너갈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할 때 비로소 기도도 통한다.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를 붙들 때보다 무언가를 내려놓을 때, 기도가 더 잘 흐르지 않을까. 나의 마음과 신의 마음이 더 잘 통하지 않을까.
〈42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대한불교 조계종이 가장 근본으로 삼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을 영어로 하면
‘다이아몬드 수트라(Diamond Sutra)’입니다.
수트라는 경전(經典)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담은 책이란 뜻입니다.
성경에도 ‘경(經)’자가 붙습니다.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경(經)’자는 알겠는데,
왜 그 앞에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붙을까요.
다이아몬드는 탄소 원자가 주변의 4개 탄소와 결합한
고압 광물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단단한 광물입니다.
어떠한 물질에도 긁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 수트라’라고 부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아침, 저녁으로 바뀐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겠지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변치 않는 영원성이 담겨야
비로소 진리가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영어로
‘다이아몬드 수트라’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왜 그런 진리를
갈구하는 걸까요.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생겨나 로마로,
로마에서 다시 세계로 퍼져갔고,
불교는 북인도에서 생겨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로 전해졌습니다.
이슬람교는 중동에서 생겨나
동남아시아에도 꽤 퍼져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환경에 살더라고
인간은 뭔가, 소멸하지 않는 영원성을
갈구합니다.
서로 다른 종교,
서로 다른 경전,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어도
끊임없이 바다의 심원을
지향합니다.
왜 그럴까요.
맞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출렁거리고,
쉼없이 생겨났다가 쉼없이 소멸하고,
끊임없이 번뇌와 마주해야 합니다.
게다가 육신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가령 비포장 도로에서
끊임없이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간다면
멀미를 하지 않겠어요?
버스에서 내려서 쉬고 싶지 않겠어요?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 평화,
그런 평온 속에 녹아들고 싶지 않겠어요?
그 평온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지향합니다.

저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길거리에 서 있는 가로수 한 그루를 봅니다.
그건 그저 나무 한 그루입니다.
그렇지만 거대한 자연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무는 자연과 속성을 공유합니다.
나무를 보면 자연이 보이고,
자연을 보면 나무가 보입니다.
둘은 서로 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고,
거대한 우주의 일부이고,
각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한 조각입니다.
그래서 이미 사람 속에
진리가 내재돼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그걸 불성(佛性)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걸 신성(神性)이라고 부릅니다.
하느님(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었다는
신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삶의 희로애락에 취해서
잠시 잊고 사는 마음입니다.
삶의 파도에 출렁일 때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영원의 평화입니다.
그걸 다시 찾아가기 위해서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그 나침반이 수시로 방향이 바뀐다면 곤란합니다.
그럼 우리의 삶도 덩달아
오락가락할 테니까요.
만약 진리가 북쪽에 있다면
정확하게 북극성을 가리켜야 합니다.
그런 나침반은 다이아몬드로 돼 있습니다.
진리에서 나온 말씀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야 변함없이 우리를 진리로 안내할 테니까요.

그러니 하루 한 줄씩 읽어보면 어떨까요.
‘경(經)’자가 붙은 책을 말입니다.
다이아몬드 바늘이 가리키는
진리의 나침반을 말입니다.
하루 5분씩, 그 나침반에서 나오는 깊은 울림을
묵상해 보는 건 어떨까요.
혹시 아나요.
우리의 삶이 망망대해에서
기우뚱 기우뚱하면서도
북극성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거친 바다,
그 내면의 깊은 평화를
나름대로 맛보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