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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1층은 유대교, 2층은 기독교…지상의 마지막 밤, 최후의 만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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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최후의 만찬. 그 와중에도 예수는 마지막을 예견했다. 제자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를 향해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사도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최후의 만찬은 말 그대로 마지막 식사였다. 예수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예루살렘 성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성의 맞은편 올리브 산으로 갔다.

 (38) 예수가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밤에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실제로는 이보다 작은 방에서 단촐한 저녁 식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실제로는 이보다 작은 방에서 단촐한 저녁 식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올리브 산에는 올리브유를 짜는 방앗간이 있었다. 그래서 명칭도 ‘겟세마네(올리브유를 짜는 골짜기)’였다. 그곳에서 예수는 땀을 피처럼 흘리며 기도를 했다. 최후의 만찬을 했던 밤과 겟세마네의 밤은 같은 날 밤이었다. 그 밤에 예수는 성전 경비병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이튿날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었다. 그러니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죽기 바로 전날 밤의 사건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예루살렘 성의 서쪽 성문인 자파 게이트로 갔다. 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있었다. 넓고 복잡한 예루살렘 성에서 자파 게이트는 일종의 약속 장소였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서로 만났다. 자파 게이트를 지나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던 장소로 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대략 15분쯤 걸었을까. 예루살렘 성의 또 다른 성문인 시온 게이트 바로 바깥에 최후의 만찬을 했던 장소가 있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가자 오래된 건물이 나타났다. 계단을 올라갔다. 마가복음에도 최후의 만찬을 한 곳이 ‘큰 이층 방’(마가복음 14장 15절)이라고 기록돼 있다.

예수가 열두 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장소다. 원래 건물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회복했을 때 다시 지어졌다. [중앙포토]

예수가 열두 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장소다. 원래 건물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회복했을 때 다시 지어졌다. [중앙포토]

2층에 올라서자 널따란 방이 나왔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는 이 장소가 최후의 만찬이 열린 장소라고 오랫동안 전해져왔다. 이 작은 건물도 이스라엘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궤를 같이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난 지 40년쯤 지났을까. 서기 70년에 유대인들은 무기를 들고 로마에 항거했다. 그들은 끝까지 버텼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그 와중에도 이 건물은 온전했다.

614년 페르시아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최후의 만찬이 열렸던 건물의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유럽에서 십자군이 내려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서야 다시 지어졌다. 그때 1층에는 ‘다윗의 묘실’을 옮겨왔고, 2층에는 ‘최후의 만찬’ 장소가 재건됐다. 다윗의 묘실이 있는 1층은 유대교의 성지이고, 2층은 그리스도교의 성지가 되었다. 1층에선 유대인들이 기도하고, 2층에선 그리스도교인들이 기도한다.

1333년부터 1552년까지 200년 넘는 세월 동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이곳을 맡았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스라엘을 장악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곳은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만찬을 했던 건물의 1층에는 다윗의 묘실이 있다. 정통파 유대교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최후의 만찬을 했던 건물의 1층에는 다윗의 묘실이 있다. 정통파 유대교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그 흔적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2층의 홀 안에는 이슬람 모스크의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이슬람 문자가 벽에 새겨져 있고, 스테인드글라스에도 이슬람 특유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반대편 구석에서는 그리스도교 순례객들이 찾아와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나는 방 가운데 서서 눈을 감았다. 2000년 전 바로 이 방, 바로 이 자리에 있었을 예수의 마지막 밤을 묵상했다.

그날은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날 밤이었다. 예수 당시 유대교인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아주 중요한 절기로 여겼다. 유월절 저녁부터 7일간이 무교절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 역사에서 결코 잊힐 수 없는 절기다. 그 유래는 구약의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유대 민족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대 지도자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에게 유대 민족의 해방을 요청했으나 파라오는 거절했다. 그러자 모세는 “이집트 땅에서 처음 태어난 것은 모두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왕의 첫아들을 비롯해 노예의 첫아들까지, 모든 가축에게서 태어난 첫 새끼도 다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문설주에 가축의 피를 바르고 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문설주에 가축의 피를 바르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외였다. 모세가 이를 피할 수 있는 묘책을 일러주었다. 집집마다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그 피를 우슬초(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라는 박하과 식물, 영적인 정화를 상징함)에 묻혀 대문의 틀에 바르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따랐다.

유대 달력으로 1월 14일 밤이 되자 파라오의 장남이 죽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의 첫아들도 죽었다. 처음 태어난 가축 새끼들도 모두 죽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문틀에 피를 바른 유대인들의 집에는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이날이 유월절이다.

넘을 ‘유(逾)’+건널 ‘월(越)’해서 유월절(逾越節)이다. 재앙을 훌쩍 넘어가는 절기다. 더 이상의 재앙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떠나는 걸 허락했다. 이 일이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우슬초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문설주에 묻히면 재앙을 넘어간다는 유월절의 의미는 유대인에게 각별했다. 실제 이로 인해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을 찾아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확인된 ‘재앙을 뛰어넘는다’는 유월절의 의미는 후대의 유대인에게도 깊이 각인됐다.

유월절에 얽힌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대속의 믿음으로 연결된다. 예루살렘 성에서 바라본 올리브 산. [중앙포토]

유월절에 얽힌 이야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대속의 믿음으로 연결된다. 예루살렘 성에서 바라본 올리브 산. [중앙포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의 죽음도 유월절의 의미와 연결된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재앙이 비껴간다고 믿었듯이,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믿음이다. 이로 인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슬로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는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39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예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지만,
“너희가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몰랐습니다.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랬습니다.
12사도는 예수의 진면목을 몰랐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 형에 처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이방의 오랑캐에게만
십자가 형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시민권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로마 제국에게는 식민지 피지배인에 불과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성화에는
천으로 된 옷을 허리에 걸치고 있습니다.
실제는 달랐습니다.
십자가 형에 처해지는 사형수의 옷을
모두 벗겼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은 더욱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너무나 치욕적이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예수는 진정 누구인가”
“그는 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였는가.
  올리브 산에 있었을 때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예수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바라만 봤는가.”
이런 물음이 숱하게 올라오지 않았을까요.
그런 물음 끝에 제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찾지 않았을까요.

예수 사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은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성령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보면 ‘나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이들은
어김 없이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두 제자들은
저마다 ‘나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무너진 틈으로 성령이 찾아오지 않았을까요.

그때 비로소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너희가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라는
예수의 고백, 그 깊은 뜻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최후의 만찬을 가졌던 공간과
마가의 다락방은 같은 공간이라고 전해집니다.
물론 당시에는 훨씬 더 작은 공간이었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기다란 테이블도 없었을 겁니다.
당시 유대인의 생활상처럼 바닥에 비스듬히 기대서
유월절 소박한 음식을 함께 나누었을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최후의 만찬 장소를 처음 찾아갔을 때는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한번 찾아갔습니다.
그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최후의 만찬과 마가의 다락방.
거기에 깃든 고요를 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찾아간 '최후의 만찬' 장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잠시 묵상에 잠기기에는 좋았습니다. [중앙포토]

다시 찾아간 '최후의 만찬' 장소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잠시 묵상에 잠기기에는 좋았습니다. [중앙포토]

그 공간에 서서 저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창 밖에서 새 소리가 들렸습니다.
2000년 전, 이곳에서 건넸을
예수의 빵과 포도주를 묵상했습니다.
그 빵과 포도주에 담긴 예수님의 음성은 이랬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태복음 26장 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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