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출총제, 이제는 간판 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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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공정거래위원회는 그간 논란의 대상이 됐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유지하되 신규 순환출자는 금지한다는 정책 방침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왜 공정위는 출총제에 집착하고 있나. 공정위가 출총제를 고집하는 이유는 재벌의 계열사 간 출자행위를 통한 '과도한 계열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계열 확장이 어떤 기준에서 과도한지, 그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사회적 비용과 사적 비용 간 어떤 괴리가 있는지 등 반드시 짚어야 할 질문에 대해선 별로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출총제의 또 다른 근거인 공공선택론에 따르면 계열사 간 출자 총량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을 초과해 계열사들의 기업가치에 손상을 주는 수준까지 이르는 경우 출총제는 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정당한 정부 개입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정부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계열사 간 출자의 수준을 알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정부가 기업 운영의 주체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출총제가 투자를 위축시켜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경제계의 주장 외에도 출총제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는 수두룩하다. 출총제가 글로벌화된 인수합병(M&A) 시장에서 국내 기업을 역차별한다는 주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공정 경쟁을 위한다고 마련한 출총제가 반경쟁적인 요소를 갖고 있음을 공정위는 알지 못한다.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은 역시 다른 대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출자 제한은 한 대기업의 경쟁 분야에 다른 대기업의 진입을 막아 버린다. 결국 개별 시장에서의 독과점 구조를 심화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지금의 출총제는 누더기식 규제다. 정부는 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된다는 비난에 대해 많은 예외 조항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인 투자에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방어한다. 원칙보다 예외가 더 중요한 규제는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에도 한국적 기업경영 풍토로 볼 때 재벌 총수의 전횡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원칙론으로 맞선다. 기업들은 공정거래법이 개정될 때마다 출총제의 적용 대상이 되었다가 빠지기도 하는 등 경영에 관한 장기 계획을 세울 수가 없는 불확실성에 처하게 된다. 예외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정책의 자의성이 크다는 것이며, 결국 경영환경의 불안정으로 이어진다.

공정위는 출총제를 폐지하지 않고 신규 순환출자 금지라는 더욱 강력한 규제 수단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의 경영권을 행사하는 관행은 시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시각은 기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정책 실패를 이미 예고하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코스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기업은 시장을 통한 거래비용을 줄이려는 대체조직이다. 시장 거래에선 다양하고 특수한 상황을 상정한 계약이 가능하지만, 기업이라는 조직은 계약의 불완전성과 방대한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려 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경영주가 통제하는 방식이 기본 전제가 된다. 이 때문에 '소유 지분만큼의 경영권 행사'라는 신념에 의해 주도되는 현 공정거래 정책의 근본적인 대전제는 기업의 본질을 무시한 것이다.

정부 당국은 기업의 선택 영역에 속하는 기업의 지배구조, 조직 형태, 소유 구조와 소유.경영 분리 여부, 부채비율, 출자총액 등 이른바 '내생 변수'에는 가급적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시장진입, 퇴출제도, 시장개방, 소비자주권 강화, 외국인 직접투자 환경 개선 등 '외생 변수'를 조정하는 역할에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 기업의 성공과 실패에 책임지지 않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경영전략에 속하는 부분에 개입하려 하는가. 규제의 효율성을 상실한 출총제는 아무런 조건 없이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병일 이화여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