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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블던 테니스공에 숨긴 비밀

중앙일보

입력

차이나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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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윔블던(Wimbledon)은 테니스의 메카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경기가 그곳에서 열린다. 경기 때 쓰이는 노란색 테니스공 얘기다.

이 테니스공 하나 만드는데 무려 11개 나라가 참여한다. 공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소재)과 완제품 이동 거리는 대략 5만 마일, 약 8만 km에 달한다. '테니스 볼 서플라이 체인'이다.

[사진 Wimbledon.com]

[사진 Wimbledon.com]

스포츠 브랜드 슬레진저(Slazenger)의 테니스공 생산 과정을 추적해 보자.

공장은 필리핀 바탄(Bataan)이라는 곳에 있다. 이곳으로 각종 원부자재가 모인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클레이(clay)가 공급된다. 그리스에서는 실리카(silica)가, 일본에서는 마그네슘이, 태국에서 아연 산화물(zinc oxide)이, 말레이시아에서는 고무가 각각 바탄으로 모인다. 한국도 노란색 염료 물질인 황(sulphur)으로 이 서플라이 체인에 참여한다.

영국은 펠트(felt, 모직을 압축해서 만든 천)를 만들어 바탄 공장에 수출한다. 이 펠트에 쓰이는 울(wool)은 뉴질랜드에서 수입됐다. 중국은 산둥(山東)의 화학 도시 즈보(淄博)에서 만든 나프탈렌을 공급한다.

마지막으로 공 담는 통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된 주석이 이용된다. 바탄의 공장 직원들은 생산된 제품을 포장해 테니스 대회가 열리는 윔블던으로 보내게 된다.

영국의 워웍대학 경영대학원인 '워릭 비즈니스 스쿨(Warwick Business School)'이 2015년 6월 발표한 연구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이 보도했다. 글로벌 밸류 체인(GVC)이 얼마나 복잡하고,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사진 Warwick Business School]

[사진 Warwick Business School]

GVC는 살아있다. 비용 절감, 생산 효율 등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슬레진저의 7년 전 테니스공 GVC 역시 지금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최적의 가치 창출을 위해 세계 곳곳을 파고들며 부지런히 서플라이 체인을 구축하고 있다.

핵심 자원이 없고, 시장이 빈약한 나라…. 그래서 우리는 수출입으로 먹고산다. 반도체 강국이면서도 소재는 여전히 중국을 포함한 외국에서 들여와야 한다. 그래서 GVC는 우리 생명선이다.

그 GVC에 심각한 크랙(crack)이 발생했다. 미·중 무역 전쟁, 그건 결국 서플라이 체인의 충돌이다. 서방 기업들은 중국에서 공장을 빼내고 있다. 중국도 자국 내 서플라이 체인의 완성을 노린다. '홍색 공급망(Red Supply Chain)'이다. 글로벌 IT 지도가 그래서 바뀌고 있다.

[사진 셔터스톡]

[사진 셔터스톡]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균열은 더 깊고, 넓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밀 생산의 약 4분의 1을 생산한다. '신라면'에 곧 전쟁의 비린내가 풍길 것이다.

이번 전쟁으로 중국과 러시아 경제는 더 밀접하게 뭉치고 있다. 미국의 진보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은 '워싱턴의 대러시아 제재로 미국 주도의 단일 지구 자본주의 시대가 끝났다'라고 말한다.

"제재 남발이 유라시아의 핵심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를 통합시키고 있다. 미국/유럽, 중국/러시아 두 진영 간 경제 전쟁(서플라이 체인의 충돌)이 시작됐을 때, 후자의 승리 가능성이 크다. 식량과 에너지 등 핵심 자원의 자급자족 능력에서 중국/러시아가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The Blowback from Sanctions on Russia, COUNTERPUNCH).

허드슨은 서플라이 체인의 분열, 그리고 충돌을 말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방 없이 사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의 제조 능력, 러시아의 에너지, 그리고 농산물…. 자족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그들이 훨씬 유리할 것이라는 게 허드슨의 생각이다.

그의 주장은 서방 주류 언론의 시각으로 전쟁을 전달하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또 다른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다.

GVC는 '슬레진저의 테니스공' 만큼이나 복잡하다. 너무 민감해 자칫 방심하면 쫓겨난다. '이쪽에 붙을까, 아니면 저쪽에 붙을까'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더 위험하다.

GVC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과제가 새 정부 경제팀에 떨어졌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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