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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크라이나인이 고발한다

文과 생각 다른 尹…평화 외치다 전쟁 맞은 우크라 현실 직시를

중앙일보

입력

드미트로 위 재한 우크라이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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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 약 200명이 지난달 27일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한 후 가두행진을 했습니다. 재한 우크라이나인 4000여 명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러시아 공격을 멈추게 해 달라'는 취지로 집회를 기획했다고 합니다. 이날 영어로 연설한 드미트로 위의 연설문을 번역, 소개합니다.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만드는 중앙일보 씽크팀 정희윤 기자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일부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서울 집회에 참여한 드미트로 위(왼쪽 남성). 그래픽=김경진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서울 집회에 참여한 드미트로 위(왼쪽 남성). 그래픽=김경진 기자

안녕하세요. 한국에 사는 한국계(조부모가 옛 소련으로 이주한 고려인) 우크라이나인 드미트로 위(Dmytro Vi)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법대를 졸업하고 법조계에서 15년간 일하다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4년 전 한국에 왔습니다. 지금은 대전의 한 병원에서 환자 이송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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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쟁이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날이 느는 희생자와 파괴의 수준은 지난 세계대전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참혹합니다. 전쟁 발발 이후 한국 정부와 국민이 보여준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재앙적 결과를 더 많은 한국인에게 알리고, 한국 정부의 보다 폭넓은 정치·인도·군사적 지원을 촉구하고자 합니다.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연설하는 트미트로 위. [사진 본인 제공]

주한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연설하는 트미트로 위. [사진 본인 제공]

한국인들에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언론 환경에 대해 우선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러시아는 오래전에 이미 언론을 무기화(weaponized)했습니다. 러시아에는 지금 정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언론 매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서방 언론에 따르면 정부 폭주에 반대 목소리를 내던 마지막 두 매체마저 한 달 전 문을 닫으면서 관변 어용 매체만 남았다고 합니다. 이 매체들은 지금 대중을 선동하는 거짓 뉴스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사람이라면 모두 겪어봐서 그 실상을 잘 알 것입니다. 러시아가 우리 땅 일부를 점령한 지난 2014년부터 러시아가 벌이는 고도의 정보전(戰)에 시달려왔습니다.

언론을 무기화한 러시아 

한국 언론인들과 독자들에게 보다 냉철한 판단을 호소하는 이유입니다. 소식통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러시아 선전 문구에 불과한 기사를 번역해서 전달하고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때마다 평화를 지키겠다는 우리 희망은 멀어져갑니다. 러시아가 퍼뜨리는 거짓말은 허무맹랑하기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전쟁 발발 초기에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해준 덕분에 우크라이나는 각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관심이 점차 줄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주목도가 보다 높은 사건으로 발 빠르게 옮겨가는 언론 속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 폭격이 남긴 건물 잔해 아래에서 아이들이 굶주림과 상처로 죽어가는데도 러시아의 의도적인 방해로 부모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비극이 여전한데, 세계 언론이 전쟁 초기처럼 주목하지 않는 게 저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런 상황이 바로 침략자가 원하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크림반도와 돈바스를 8년 동안 점령하면서 벌어졌던 일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러시아 언론은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포장했고, 그 덕분에 세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우리가 맞닥뜨린 겁니다. 참혹한 침략 전쟁 말입니다. 이런 과거만 돌아봐도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혹은 푸틴의 뜻대로 고분고분해질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2019년 프랑스에서 평화 협상을 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중앙포토]

2019년 프랑스에서 평화 협상을 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중앙포토]

저 먼 남의 나라 얘기라고요? 푸틴이 과연 우크라이나로 그칠까요?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했던 것처럼 영토 확장을 계속해나갈 것입니다. 이미 폴란드를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약자의 유화책? 침략자에 빌미 제공 

한국은 지금 북한의 핵 위협, 코로나 19와의 싸움, 한·일과 한·중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저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런 현안을 다루는 데 있어 윤 당선인이 문재인 대통령과는 다소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의회 연설이 무산된 것과 달리 윤 당선인은 대선주자일 때부터 우크라이나 편에 섰고, 당선된 후인 지난달 29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영상 대화를 통해 우크라이나 문제가 한국에게 주요 의제이고 앞으로도 긴밀한 협력을 할 것이란 희망을 보여줬습니다.

제가 한국 정부의 정치적 선택을 평가하거나 조언할 입장은 못 됩니다. 다만, 러시아가 지난 8년간 호시탐탐 우크라이나를 노려온 과정에서 보고 느낀 점을 우크라이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 꼭 전하고 싶습니다. 침략자에게 유화책은 전혀 소용없었습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 때 푸틴은 우리를 나약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 아래 실제로 군사력을 과시했습니다. 윤 당선인은 이런 우크라이나의 우(愚)를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은 지난달 29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왼쪽)은 지난달 29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다. [연합뉴스]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오래전부터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전쟁 발발 이후 난민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이주민 대부분은 폴란드·체코·독일 등 인근 국가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지구 반대편인 한국까지 찾은 건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가치를 공유하고,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의 전통을 존중합니다. 한국의 성공과 번영을 늘 함께 기원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 한국에 있습니다.

평화 얻겠다고 핵 포기한 결과 

최근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 회담과 관련해 큰 기대가 없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아마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다 그럴 것입니다. "러시아가 서명한 협정은 그것이 적혀 있는 종이 한장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러시아는 대내외적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국제조약을 기꺼이 이용해 왔습니다. 푸틴은 제아무리 국제조약을 맺었다 해도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어길 겁니다. 우크라이나는 이미 핵무기 러시아 이전(핵 포기)을 대가로 정치적 독립을 보장받았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1994년)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우호 조약(1997년), 돈바스 전쟁 정전 협정인 민스크 협정(2014년) 등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후로는 러시아가 한 그 어떠한 약속도 믿지 않게 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는 결국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안전보장을 받는 모양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계속 싸우기만 하겠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러시아가 기만적으로 나온다 해도 대화를 해야 합니다. 전쟁을 궁극적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전쟁 포로를 교환하고 위험 지역 난민 보호에 그칠 뿐이라 해도 말입니다.

비상시국국민회의 등 보수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7일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스1]

비상시국국민회의 등 보수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7일 서울 용산구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서 우크라이나를 응원하는 집회를 열었다. [뉴스1]

우크라이나는 지금도,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평화를 원합니다.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기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크라이나에는 인도적 지원을 하고, 러시아에는 더 강력한 제재를 가할 국제사회의 연대가 절실합니다. 인류가 과거의 큰 전쟁에서 배운 게 있다면, 세계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몰고 가는 미치광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대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얻겠다고 핵무기를 포기한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십시오. 우리의 모습을 보고도 세계의 비핵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한국이 스스로의 주권을 지키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려 싸우고 있는 한 나라를 돕는 데 앞장서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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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를 담은 드미트로 위의 칼럼과 함께 보면 좋을 외교덕후 회사원 신태환씨의 글과 스탠퍼드대 홍태화 학생의 글을 소개합니다. 러시아 편을 들거나 국제관계에 무지한 한국인에게 하는 쓴소리는 아프게 다가옵니다. 전문은 중앙일보 사이트 나는 고발한다 섹션(www.joongang.co.kr/series/11534)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