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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홍태화의 별별시각

우크라도, 대만도 남의 일? 경제대국 한국에게 남의 일이란 없다

중앙일보

입력

홍태화 국제관계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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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통계"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도 많은 한국인에겐 그저 강 건너 불구경 같은 일인 듯하다.

SNS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게임 관전하듯 논평하는 글이 쏟아진다. 강한 나라가 약소국을 침공하는 걸 왜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느냐, 아마추어 코미디언 대통령이 부른 불행이라는 비아냥도 눈에 띈다.

러시아 침공 직후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페이스북 포스팅. 러시아를 비난하는 대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박범계 페이스북 캡처]

러시아 침공 직후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페이스북 포스팅. 러시아를 비난하는 대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박범계 페이스북 캡처]

정파적으로 각색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일부 진보 진영 인사들은 지나친 친서방 정책으로 러시아를 자극한 우크라이나 정부가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가 중국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걸 이렇게 에둘러 주장한다. 루스키 미르(러시아적 세계), 즉 러시아 정교회를 정신적 기반으로 한 범 슬라브계의 지정학적 공간에 대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광적인 집착은 무시한 채 '나토 동진의 부당함'이라는 크렘린 주장만 반복한다.

러시아라는 거인의 상시적 위협 속에서 친서방 행보를 보인 우크라이나를 탓할 수 있는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해 전쟁까지 치른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러시아는 2014년 갑자기 '나토 확장의 위험'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2009~2014년 그 어떤 미·러 회담에서도 나토 확장은 언급되지 않았다. 201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반(反) 푸틴 시위, 독재정권들을 무너뜨린 '아랍의 봄'에 이어 2014년 우크라이나의 친러 독재자 야누코비치까지 실각하면서 푸틴은 권력에 더욱 집착하기 시작했다. 푸틴의 국내 정치적 고려와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러시아의 공세적 외교를 무모한 수위까지 올렸다.

정파적 이용 궁리만 하는 정치인들 

그런가 하면 일부 보수 인사들은 우리도 우크라이나처럼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고 공포를 주입한다. 문재인 정부 이후 한·미 공조가 약해진 건 부인할 수 없지만, 한·미동맹의 존재와 그 함의를 간과한 것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미군의 우크라이나 투입에는 선을 그으면서도 “나토 영토 침범은 단 1인치도 용인하지 않겠다"고 선제적으로 엄포를 놓는 것은, 나토 헌장 5조에 가맹국들의 집단 안보가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20년 나토에 가입한 인구 200만의 북마케도니아가 우크라이나보다 전략적 중요성이 더 커서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나토에 포함됐느냐 아니냐 하는 지위의 차이다. 물론 북한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미국 본토를 겨냥하는 있는 와중에 우리가 미국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며, 강력한 독자적인 국방력은 필수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핵우산의 보호를 받는 한국은 우크라이나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우려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크라이나가 불쌍하긴 하지만, 우리 일이 아니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일함이 대표적이다. 전쟁 초기 문재인 정부는 남·북·러 가스관을 언급하며 한·러 협력을 강조했다. 또 세계가 규탄하는 와중에 침묵했다. 이런 정부에 분노와 실망이 크지 않았던 데는 이런 안일한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지난 2월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 초청 2차 법정 TV 토론회에서 대선 후보들은 여야 모두 좁은 시각을 보여줬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국민의힘 윤석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뉴스1

지난 2월 제20대 대통령선거 후보 초청 2차 법정 TV 토론회에서 대선 후보들은 여야 모두 좁은 시각을 보여줬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국민의당 안철수, 국민의힘 윤석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뉴스1

이런 태도는 우크라이나 사태에 국한하지 않는다. 지난 2월 한국 대선 후보 토론에서 각 당 후보들은 한반도 유사시 자위대 진입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차출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논의했다. 한마디로 남 일에는 철저하게 물러서 있자는 발상이다. 여기서 특정 국가에 주둔한 미군은 그 나라 위협에만 대항한다는 식의 희망적 사고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군은 전 세계에 7개 지역별 통합사령부를 운영하고 있다. 2019년 신설한 우주군을 제외한 나머지 사령부는 역내 각국에 흩어져 있는 미군들에 특화된 임무를 부여한다. 한 곳에서 대규모 분쟁이 벌어지면 다양한 군사자원을 결집해 대응하기 위해서다. 주둔국들은 미군의 존재 자체가 평시에 인계철선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웃국가가 공격받을 때 자국 내 미군의 차출을 감수하는 것이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은 인도·태평양 사령부 소속이다. 주일미군은 한반도 유사시 조기에 투입될 미군 전력이며, 최전방을 지원하는 병참기지다. 한국이 주한미군의 대만 차출을 반대하는 명분과 같은 논리로, 일본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 위험을 운운하며 “주일미군 차출을 막겠다"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을까.

보호만 받으려는 안보 인식 

중국과의 무력 충돌은 재앙이 될 수 있으며, 주한미군의 대만 투입은 북한의 핵위협을 마주하는 우리로선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중국의 대만 수복 야욕을 억제하는 데 기여할 의지도, 한반도 밖의 안보현황에 그 어떤 이니셔티브를 취할 생각도 없이 그저 보호만 받기 원하는 건 올바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처음 도마 위에 올랐던 게 2005년이다. 17년이 지나 대한민국 위상은 높아졌지만, 그 어떠한 프레임의 전환도 찾아볼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14일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글로벌공급망 안정 방안 등을 논의하는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했다. 러시아 침공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월 14일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글로벌공급망 안정 방안 등을 논의하는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를 했다. 러시아 침공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한반도 밖의 사건과 위협을 먼 나라 일로 치부하며 아전인수식 교훈 찾기에 몰두할 게 아니라, 직간접적인 영향을 직시하고 대응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범지구적인 파문을 가져왔으며, 이 변화는 다시 2차 파도를 수반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급상승한 유가가 전부가 아니다. 식량 공급 차질도 큰 문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세계 농업 생산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코로나 19로 세계 식량 비축량이 빠듯한 가운데 전 세계적 식량 위기가 임박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건 이런 이유다. 금융체계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이란·인도 등과 새로운 결제시스템 구축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 위안화의 부상까지 겹쳐 전후 국제통화질서인 브레턴우즈 체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국의 글로벌 동맹 네트워크에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유럽에서는 독일을 필두로 그간 국방비 증강을 거부해 온 국가들이 재무장에 나섰다. 이들이 지역 방위분담에 나서며 미국의 부담을 덜어줄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중동의 미 동맹국들은 러시아 규탄을 거부하며 대러유엔결의안에 기권했다. 지난 10여년간 중동에서 점진적 철수를 꾀하며 이란이라는 지역 공동의 적에 유화책을 던지는 미국과, 시리아 내전에서 동맹 아사드를 위해 단호히 참전한 러시아의 모습이 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중동, 동아시아 중 한 곳에서 지역 안보가 흔들리면 다른 지역에서 미국의 관심도가 하락하는 경향이 있기에 우리도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중국이 태평양에서 견제없이 영향력을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아프간-이라크 전쟁의 늪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아시아 전문가들은 강대국 경쟁의 큰 틀에서 중·러의 협력을 경계한다. 중국 입장에서 유럽과 척 지면서까지 ‘공공의 적’이 된 러시아를 보호할 리는 만무하지만, 중국 의존도가 급상승한 러시아로선 매력적이다. 존스홉킨스대학 할 브렌즈 교수는 중국과 러시아가 동시다발적으로 자유주의 질서를 공격하는 행태를 ‘유라시아 악몽'이라 했다. 이러한 흐름은 중국의 그림자 아래 놓인 우리와 절대 무관하지 않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 반열에 오른 우리에게 더 이상 '남의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