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푸틴이 내 롤모델" 헝가리 리틀 푸틴, 러시아 손절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부다페스트 바르케르 바자 회의장에서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부다페스트 바르케르 바자 회의장에서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첫번째 동유럽 선거가 3일(현지시간) 헝가리에서 치러진다. 그간 친(親)러 행보로 ‘리틀 푸틴’이라 불렸던 빅토르 오르반(59) 현 총리는 최근 국내 반(反)러 정서가 심해지자 러시아 제재에 적극 가담하는 등 푸틴에게 등 돌리며 선거 승리를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EU 국가 최장기 집권…야당과 박빙 승부

오르반 총리는 유럽연합(EU) 국가의 수장 가운데 최장기 집권 중이다. 1998년 35세에 유럽 최연소 총리가 됐다 2002년 사회민주당에 정권을 내줬다. 이후 2010년 재집권에 성공해 2014년과 2018년 선거에서 내리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3일 총선에서 승리하면 통산 5선, 4연임에 성공하게 된다.

총선 일주일 전인 지난달 28일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그가 이끄는 집권당 피데스(Fidesz·청년민주동맹)의 지지율은 41%로, 지지율 39%인 야당연합과 불과 2%포인트 차 박빙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일부 여론조사기관은 유권자의 4분의 1이 아직 투표할 후보를 결정한지 못한 상태로, 선거일이 가까울수록 피데스의 우위가 줄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2014년, 2018년 총선에서 전체 의석수 199석 중 3분의 2가 넘는 133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오르반 총리는 사법부와 언론 탄압을 서슴지 않아 ‘빅테이터(‘빅토르’와 독재자를 뜻하는 ‘딕테이터’의 합성어)’로 불린다. 그는 “민주주의를 택하되, 자유는 제한할 수 있다”는 ‘제한적 민주주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실행에 옮겨왔다.

단독 개헌이 가능한 의석수를 활용해 사법부와 검찰의 독립성을 허물고 정부 견제 역할을 수행해온 헌법재판소의 권한도 대폭 축소했다. 판검사 정년 연령을 70세에서 62세로 낮춰 연륜있는 판검사를 퇴직시키고, 친여 성향 법조인으로 물갈이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미디어법을 만들어 재갈을 물리고, 사실상 정부의 홍보기관으로 만들었다. 국경없는기자회가 조사한 ‘미디어 자유 지수’에서 헝가리는 180개국 중 87위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운데)가 지난달 15일 수천명의 지지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운데)가 지난달 15일 수천명의 지지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反EU·현금살포로 인기…인플레·전쟁에 역풍

오르반 총리는 극우 민족주의와 편가르기, 현금살포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으로 정치 기반을 다졌다. 그는 “헝가리인을 위한 헝가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극단적인 반 난민, 반 EU 정책을 펼쳤다. 오르반 총리는 EU의 난민강제할당제에 반기를 들고 2015년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단 한명의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비셰그라드 그룹(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국가가 독일·프랑스가 주도하는 EU에서 더 많은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며 서유럽과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포린폴리시는 “푸틴을 롤모델로 언급한 오르반 총리는 EU를 적대시하고 러시아에 동조하는 게 국익에 부합한다는 교묘한 주장을 펼쳐왔다”고 전했다.

경제 성장도 오르반 총리의 인기 요인 중 하나다. 그의 재임 기간은 글로벌 저성장·저물가 시기와 겹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를 포함해 유럽중앙은행·영란은행 등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추면서 전 세계 큰 손들이 신흥시장 투자를 늘렸고, 헝가리도 막대한 외자 유치에 성공해 호황을 맞았다. 오르반 총리는 이를 자신의 치적으로 포장해 ‘능력있는 지도자’ 이미지를 쌓았다. 선거 전에는 세금 환급, 소득세 면제 등 현금살포 정책으로 유권자의 환심을 샀다.

이번 선거에서는 그간 자신의 정책에 발등을 찍혔다. 천문학적인 돈을 풀었던 현금살포 정책이 글로벌 금리인상과 맞물려 유례없는 물가상승이 이어졌다. 지난 2월 헝가리의 물가상승률은 8.3%로 2007년 이후 역대 최대였다. 헝가리국립은행(MNB)은 “5월 이후 식품 및 휘발유 가격 동결이 종료되면 인플레이션이 급증할 것”이라며 “7월 이후 11%를 초과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통화가치 하락도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 헝가리 포린트화의 1달러당 환율은 지난달 7일 362.36포린트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헝가리 10년간 물가상승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헝가리 10년간 물가상승률.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1달러당 헝가리 포린트화 환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1달러당 헝가리 포린트화 환율.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헝가리 GDP 대비 정부부채.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헝가리 GDP 대비 정부부채.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친러, 반EU’ 성향의 오르반 총리에 대한 헝가리인의 반감에 불을 지폈다.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 참석한 은퇴 공무원 알베르트 코바치는 파이낸셜타임스(FT)에 “오랜 기간 오르반에게 투표했지만, 그의 친러 성향이 항상 불안했다”면서 “이미 러시아는 피 냄새를 맡았고, 헝가리는 다시 러시아 영향권 밑으로 돌아가선 안된다. 오르반에 대한 지지를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오르반 총리의 ‘러시아 손절’ 행보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회주의적 행보”라고 평가한다. 그는 과거에도 정치적 이익에 따라 수시로 얼굴을 바꿔왔다. 미국 싱크탱크 독일마셜펀드의 다니엘 헤게뒤스 애널리스는 “오르반은 자유주의 민주투사에서 보수로, 나중에는 포퓰리스트 급진 우파로 변신해왔다”고 지적했다. 유로뉴스는 “권력을 잡기 위해 정치적 입장을 수시로 바꿔온 기회주의자”라고 전했다.

지난 2월 26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반전 시위. 연합뉴스

지난 2월 26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반전 시위. 연합뉴스

야당연합의 '중도우파' 단일후보도 위협적

똘똘 뭉친 야당연합도 위협적이다. 선거 때마다 분열했던 야당은 ‘오르반 축출’을 목표로 정치 4년차 페테르 마르키-저이(50)를 6개 당 단일 후보로 선출했다. 과거 야당 후보들이 오르반 총리의 극우 민족주의와 대척점에서 좌파적 정책을 내놨던 것과 달리, 중도우파 성향의 마르키-저이는 7명의 자녀를 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의 이미지를 내세워 기존 오르반 총리와 피데스 지지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페테르 마르키-저이 야당연합 단일 후보가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헝가리 혁명과 독립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페테르 마르키-저이 야당연합 단일 후보가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헝가리 혁명과 독립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뉴욕타임스(NYT)는 “오르반의 당선에 매우 유리하게 게리맨더링 돼 있는 선거구, 오르반이 장악한 언론 등 ‘매우 기울어진 운동장’이 가장 큰 변수”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이번 총선은 국민투표와 동시에 진행되는 이례적인 선거다. 헝가리에서는 미성년자 성전환 수술이 불법임에도, 유권자들은 선거날 ‘미성년 자녀에 대한 성전환 치료를 동의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찬반 투표를 해야 한다. 오르반 총리는 선거 기간 내내 “야당이 집권하면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부모 동의없는 성전환 수술’을 허용할 것”이라는 루머를 퍼뜨려왔다. 카탈린 체 하원의원은 “국민투표는 유권자의 판단을 흐트리기 위한 연막”이라고 비판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회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 회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포린폴리시는 “오르반 총리가 당선되면, 러시아 제재를 둘러싼 유럽의 단일대오를 깨뜨리고 서방을 위협할 것”이라며 “헝가리 총선 결과는 ‘푸틴주의의 망령’이 유럽에 얼마나 자리잡을지 판단할 기준”이라고 평가했다. 헝가리 싱크탱크 폴리티컬캐피탈의 피터 크레코 소장은 “오르반이 연임에 성공하더라도,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 어렵고, 유럽 내 입지도 좁아질 것”이라며 “유럽에 극우 민족주의 블록을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이미 깨졌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