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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재련의 일리(1·2)있는 논쟁

성추행에 '목욕탕 공포' 생긴 남성…그를 도운건 여가부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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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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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의 새 기획 칼럼 시리즈 '나는 고발한다. J'Accuse...!'가 대선 이후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이슈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는 '나는 고발한다 번외편-일리(1·2)있는 논쟁'을 22일부터 일주동 동안 매일 연재합니다. 여성가족부 폐지 찬반 의견, 탈원전 이슈 등을 다룰 예정입니다. 여가부와 함께 성폭력 피해자 변호를 해온 김재련 변호사는 "여가부 '폐지'가 아닌 보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김 변호사 칼럼에 이어 23일엔 어린 시절 여가부 도움을 받았다는 박민영 전 국민의힘 청년보좌역의 "부처 이름이 그 역할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면 이젠 다른 이름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 게재됩니다. 더 다양한 글은 중앙일보 사이트 나는 고발한다 섹션(www.joongang.co.kr/series/11534)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그래픽=김경진 기자

여성가족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러나 직접 나서서 말하기 어려운 이들을 대리했던 변호사로서 여가부 폐지론으로 시끄러운 지금 꼭 전하고 싶은 몇몇 사연이 있다.

중학교 시절 삼촌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본 A의 이야기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고교 졸업 직후 미국으로 떠났다. 가해자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 수 없어서.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20대 후반부터 정신과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무려 쉰살이 넘어서야 용기를 내 한국에 왔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다. 가해자 처벌은 할 수 없었지만 본인은 여전히 악몽과 불안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수십 년 전의 성폭력 피해는 현재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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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성폭력 사실이 인정된다 해도 손해배상청구는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이 기억에 남는다. “판사님, 제 말씀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정에서 제 이야기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이겼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소송 법률대리는 여가부가 지원했다.

여가부 도움 받은 생존자들

지난 2일 서울 인권위원회 앞에서 성폭력 사건의 대법원 장기 계류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지난 2일 서울 인권위원회 앞에서 성폭력 사건의 대법원 장기 계류를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옆집 아저씨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본 지적장애 미성년 청소년 B도 있다. 직장 일로 바빴던 엄마는 그저 옆집 아저씨가 친절을 베푼다고 생각했다. 어린 딸을 자기 집으로 불러 놀아주는 아저씨가 고마워서 셔츠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성폭행 가해자였다. 날짜 개념조차 부족한 그녀가 수사기관 조사를 받고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때도 여가부의 무료법률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았다.

청소년 C가 모텔에서 성폭력을 당한 사건도 있다. 처벌 받은 가해자뿐 아니라 청소년 출입을 제지하지 않은 모텔 업주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했다. 피해 학생을 대리해 모텔 업주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15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 또한 여가부 무료법률지원사업에 의한 것이었다.

18년 이상 친아버지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본 D가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가족에게 피해를 털어놓았다. 정신감정을 통해 피해자는 ‘학대 순응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어린 시절부터 친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성폭력, 다른 가족의 무기력한 모습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학대순응증후군으로 인한 심리적 항거불능 상태’라고 판시했다. 여가부는 법률지원뿐 아니라 친족 성폭력 피해로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 어려운 피해자를 위한 주거공간도 지원했다.

남성 피해자에도 똑같은 도움

여자만 도와준다고? 아니다. 서울의 유명 미용실에 취업했다가 남자 원장으로부터 추행 피해를 입은 E는 남자다. 경찰이 피해 남성에게 "군대 안 갔다 왔느냐, 뭐 이런 거로 고소를 하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사건을 대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 사건도 여가부가 법률지원을 했다.

태권도 사범으로부터 오랜 기간 추행 피해를 입은 남자 청소년들이 있다. 지속적 성추행 트라우마로 대중목욕탕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됐다는 F, 가해자가 운전했던 승합차와 같은 기종 차량의 시동 소리만 들어도 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G도 있다. 이들이 법률지원과 함께 정신과 상담치료까지 받을 수 있는 것도 여가부 예산 덕분이었다.

정식으로 변호사를 찾아 유료로 선임할 수 없는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위해 여가부 공무원들은 예산 확보 철이면 신새벽부터 기재부를 방문해 읍소를 하다시피 한다. 그렇게 확보한 예산으로 폭력 피해자에 대한 법률지원, 의료지원, 상담 지원, 보호시설 지원, 상담소 지원을 한다. 피해자의 안전한 일상은 이런 노력 덕이다.

‘여성가족부 폐지’가 대통령 공약이었다. 폐지가 뭔가. 쓸모없어 버린다는 거 아닌가. 내가 아는 한 여가부는 그런 부처가 아니다.

존폐 기로에 선 여성가족부. [뉴스1]

존폐 기로에 선 여성가족부. [뉴스1]

지적장애 청소년 피해자를 법률 지원하고 상담 지원하는 일이 쓸모없는 일인가? 장기간 친족 성폭력 피해로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이 없애 버려야 할 따위의 일인가? 어린 남학생이 성추행 피해로 입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도록 의료지원을 하고 법률지원을 하는 것이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하찮은 일들인가?

윤 당선인도 개선 의지 있다 믿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나와 생각이 같을 거라 믿는다. 폐지를 당위로 하기보다 폐지의 원인이 된 문제를 보완하고 개선하면 되지 않을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다. 극단적이거나 권력만 탐하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잘못 탓에 여가부를 폐지한다면 당장 도움이 필요한 피해자들의 법률지원이나 의료지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오래된 낡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있지 그게 뭐 자랑이라고 떠들고 다니나’라며 오히려 피해자를 타박한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비난하기도 한다. 사건 후에도 피해자들은 일상을 살아내야 하므로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쉽지 않다.

일상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가명으로 조사를 받고 가족들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피해자들이 여가부 폐지에 맞서 ‘나는 여가부 도움을 받은 피해자다, 꼭 필요한 부처다’라고 나서서 말할 수 없다.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하고 있는 김재련 변호사. [중앙포토]

2020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하고 있는 김재련 변호사. [중앙포토]

나 역시 지금의 여가부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존폐 위기에 처한 건 존재 이유를 분명히 해야 했을 시점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잘못이 크기 때문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을 "전 국민이 성인지 감수성을 학습할 기회"라고 말했던 여가부 장관,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한 전직 여가부 장관, 여성단체 활동경력을 발판삼아 여의도로 갔음에도 피소 사실을 가해자에 유출한 자칭 페미니스트 국회의원, 그들이 권력의 곁에서 정신을 놓은 사이에 수많은 피해자를 태운 여가부 함선은 난파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이들에게 여가부 폐지 논란에 대한 부채 청구서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여가부 함선에 오른 수많은 피해자가 있는 한, 여가부의 항해는 계속되어야 한다.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슨 곳은 고치고 조이면 된다. 여전히 여가부 함선이 필요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이 글을 쓴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인께 부탁드린다. ‘빈대만 잡으면 됩니다.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은 태우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