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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 놓치고 이제야 FDPR 면제받고선…"美 고마워했다"는 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전략물자관리원에 국제사회 수출통제 및 제재 대상 주요 국가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서울 강남구 전략물자관리원에 국제사회 수출통제 및 제재 대상 주요 국가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 대러 수출 금지 제재의 근거가 되는 해외직접제품규칙(FDPR) 적용에서 한국을 면제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여기서 면제를 받으면 미국이 아닌 자국의 수출통제 체제 내에서 제재를 이행할 수 있는데, 미 상무부가 지난달 24일 처음 ‘제재 동참 파트너’ 32개국을 발표할 때는 한국이 빠져 논란이 됐다.

“이렇게 늦을 일이었나” 회의론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한국을 대러 압박에 동참하는 파트너국으로 거명한 데 이어(1일 국정연설) FDPR 면제조치가 이뤄진 것은 동맹뿐 아니라 한국이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한다는 측면에서도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 안팎에서는 ‘애초에 이렇게 늦을 일이 아니었다’는 반응이 동시에 나온다. 미국의 수출통제 제재의 핵심은 반도체와 정보통신기술 등 관련 57개 품목의 대러 수출 금지다. 해외에서 미국 기술이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생산한 제품도 제재 대상이기 때문에 한국 등 주요 수출국도 적용받는 조치다.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소방관들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발생한 건물 화재를 진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소방관들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발생한 건물 화재를 진화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에 미국은 지난 1월 중순부터 정부에 관련 협의를 요청했다. 제재 대상 품목은 물론이고, 최종 소비재는 여기서 제외된다는 내용도 공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대러 수출 통제에 대한 정부의 조치는 톱니바퀴가 잘 맞지 않은 채 느릿느릿 이뤄지는 분위기였다. 정부는 지난달 24일 오전 “러시아가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직후 실제 러시아가 전면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러 전략물자 수출을 차단하고, 미국이 제시한 57개 제재 품목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도 곧 확정한다는 정부 발표는 지난달 28일에야 나왔다.

개괄적 후속조치 발표도 ‘느릿’ 왜?

제재에 동참한다는 입장을 공식화할 때는 내부적으로 준비가 마무리된 다음에 발표하는 게 상식적이다. 그런데 후속조치 발표가, 그것도 가이드라인 수준의 발표가 나흘이나 지난 뒤 이뤄진 것을 두고 배경에 의문이 제기됐다. 그 사이 한국이 FDPR 면제 대상국에 들지 못한 사실까지 알려지며 정부의 소극적 대응에 대한 국내외적 비판이 이어졌다.

이와 관련,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합병 당시 이미 대러 수출 통제 제재를 시작한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제도적 측면을 기술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무 차원에서는 지난달 24일 제재 동참 방침을 정했을 때 후속조치에 대한 준비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후속조치 발표 시점을 두고 정부 내부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관련 사정에 밝은 관계자는 “사실 2월 28일에 발표한 내용 정도의 후속조치는 제재 동참 방침을 밝힌 직후에도 발표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각에서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인사의 방미 및 한‧미 협의 일정에 맞춰 발표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개진해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국내적 효과를 극대화하자는 취지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관계자는 “제재 동참 결정 뒤 수출 통제 참여 방안 논의가 이뤄졌고, 3월 1일 미국과의 국장급 협의에 앞서 큰 틀에서 메시지를 한번 내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28일 발표가 이뤄졌다. 다른 요인에 따른 발표시점 조정 등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FDPR 면제=신뢰, 존중의 의미

이와 관련, 미국을 방문한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3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상무부 돈 그레이브스 부장관 및 달립 싱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 등을 면담했다. 산업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한‧미 동맹 및 경제협력의 굳건한 공조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의 FDPR 면제 승인을 성과로 꼽으면서다.

방미 중인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러시아 수출통제 문제와 관련해 미 상무부, 백악관 관계자들과 면담한 뒤 기자들과 문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미 중인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3일(현지시간) 러시아 수출통제 문제와 관련해 미 상무부, 백악관 관계자들과 면담한 뒤 기자들과 문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다만 FDPR의 면제를 받는다고 해서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 등 해당 품목들을 러시아에 수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관련 심사·승인 절차 및 위반 시 처벌 절차를 미국이 아닌 한국 관할에서 진행한다는 의미다.

이는 미국이 제재에 동참하는 동맹 및 우방의 수출 통제 및 사법 체제를 그만큼 믿고 존중한다는 ‘예우’로 볼 수 있다. 실익도 실익이지만, 상징적 의미가 더 큰 셈이다. 초기에 이런 ‘신뢰의 고리’ 안에 들어가는 게 중요한 이유다.

불필요한 의심 사놓고 성과 홍보?

하지만 정부가 이런 면제 ‘첫차’를 놓친 데다 후속조치 발표도 늦어 국내적으로 불안과 혼선을 빚고, 미국 등 자유진영으로부터 한국의 제재 의지에 대한 불필요한 의구심을 산 것은 뼈아픈 결과라는 지적이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발표한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수출 금지 제재 중 해외직접생산품규칙’(Foreign Direct Product Rule) 예외조항. 당시 한국은 면제 대상에서 빠졌다. 상무부 웹사이트 캡처

미 상무부가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발표한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수출 금지 제재 중 해외직접생산품규칙’(Foreign Direct Product Rule) 예외조항. 당시 한국은 면제 대상에서 빠졌다. 상무부 웹사이트 캡처

이와 관련, 여 본부장은 워싱턴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 측으로부터 한국의 참여가 늦었다는 취지의 이야기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전혀 그런 건 없었다. 오히려 한국이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수출 통제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데 사의를 표했다”고 답했다. “한국이 미국과 밀접하게 공조를 하면서 대러 수출 통제나 제재에 동맹 차원에서 동참한 것에 사의를 표하는 우호적 분위기였다”면서다.

하지만 의견 차이가 매우 큰 갈등 사안이거나 작심하고 공개적으로 파열음을 내겠다는 의도가 아니고서야, 불만이 있더라도 동맹 간 고위급 외교 회담에서 노골적으로 이를 표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국이 고마워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안일한 인식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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