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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쥐고 오열...최민정에 전해주고픈 말 '걱정말아요 그대'[니하오 베이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11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인도어 스타디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베이징=김경록 기자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뒤 11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인도어 스타디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베이징=김경록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2016년이었다. 2015년 만 16세의 나이로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대표팀 막내는 태극마크를 단 지 1년 만에 '대표팀의 쌍두마차'로 떠올랐다. 2년 뒤 다가올 평창올림픽 기대주인 그를 만나러 당시 대표팀이 훈련하던 태릉 선수촌으로 향했다.

첫 인상은 '얼음'이었다. 크지 않은 키(1m62㎝)에 두꺼운 뿔테 안경,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오는 답은 다소 딱딱했다. 당시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뒤에도 희미한 웃음만 짓던 장면이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무엇으로 푸느냐"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느냐"는 신변잡기를 물었다. "책 읽는 게 유일한 취미고, TV도 잘 안 봐요." 당시 인기있던 아이돌 '엑소'에서 아는 멤버가 있냐고 묻자 "1명도 없다"고 했다. 가장 최근 읽은 책은 기욤 뮈소의 책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읽어보니 판타지와 로맨스가 버무려진 소설이었다. 소녀 같은 감성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애교 섞인 포즈로 사진을 찍자고 하니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머니에게도 문자를 잘 안 한다는 '얼음 공주'다웠다. 사진기자 선배와 함께 달래가며 '꽃받침 포즈'로 촬영했다. 동료 기자는 '그 친구가 이런 포즈로 이런 표정을 지었어"라며 재밌어했다.

2016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모습. 박종근 기자

2016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모습. 박종근 기자

대표팀 훈련을 반나절 정도 따라다닐 기회가 있었다. 그는 실내체육관 안을 달리고 또 달렸다. 정해진 훈련 시간이 끝나 휴식 시간인데도 달리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와 함께 에이스로 불리던 선수, 두 명이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고,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래서 세계 최고가 됐구나.' 몇 년 뒤에 불미스러운 일이 밝혀졌을 땐 '같은 코치에게 배우면서 서로 얼마나 많이 경쟁했고, 상대에게 지지 않으려 했을까'란 생각도 떠올랐다.

2017년 그는 연세대로 진학했다. 한국체대를 선택하지 않은 건 이례적이었다. 쇼트트랙 에이스들은 대부분 한국체대 출신이다. 하지만 한국체대는 국립대학이라 재학중엔 실업팀에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학적은 연세대지만 성남시청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당시 연봉은 2억원(추정)이었다.

쇼트트랙 관계자는 "고생한 가족들을 위해 실업팀에 가고 싶어했다"고 귀띔했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 이재순씨는 고교 시절 국제대회 상금을 받고, 자신을 백화점으로 데려갔는데 이를 흐뭇하게 본 직원이 가격을 깎아줬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든든한 지원을 해준 어머니 이재순씨와 손 하트를 만들며 활짝 웃고 있다.

든든한 지원을 해준 어머니 이재순씨와 손 하트를 만들며 활짝 웃고 있다.

순탄치 않은 길임에도 그런 결정을 내린 그가 안쓰러워보였다. 예상대로 외부에서 그를 흔들었다. 한국체대 교수였던 A씨가 연세대행에 분노해 전담코치에게 압박을 넣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손가락의 오륜 반지에선 올림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기다리던 2018 평창올림픽. 500m 결승에서 두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곧 실격 판정이 내려졌다. 덤덤했다. "후회없는 경기를 해서 만족한다." 다음날엔 패기 넘쳤다. "손 짚고 나가서 진로방해라면, 손을 안 짚고 나갈 수 있게 해야겠죠? (앞으로 경기는)'꿀잼'이지 않을까요."

엄청난 자신감이었다. 1500m 결승에서 정말 손을 짚지 않고, 바깥쪽으로 추월해서 금메달을 따버렸다. 3000m 계주 준결승에선 이유빈이 넘어지자 벼락같이 달려가 터치한 뒤 한 바퀴를 따라잡고 결승에 오르는데 힘을 보탰다.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던 올림픽 금메달 2개를 딴 뒤에야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차지한 뒤 시상식에서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에 출전해 금메달을 차지한 뒤 시상식에서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2022 베이징 올림픽을 꼭 한 달 앞둔 1월 5일. 진천선수촌에서 선수단 미디어데이 행사가 열렸다. 취재진은 모두 그를 만나고 싶어했다. 인터뷰를 고사했다. 몇 달 전 밝혀진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질문이 부담스러워서인 듯 했다. 기자들은 '그 일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가 진행됐다. 여느 때처럼 무덤덤한 표정으로 나선 그는 "역시 한국하면 쇼트트랙"이란 각오를 밝혔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모습이 예전보다 작아보였다. 연이은 부상과 심적인 압박감 때문인 것 같았다.

베이징 올림픽 1000m 경기. 준준결승과 준결승 모두 험난하게 통과한 그는 결승에서 기어이 은메달을 따냈다. 하지만 기쁨의 미소는 잠깐이었고, 눈물을 계속 흘렀다. 태극기를 손에 쥐었지만 오열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이 겪었던 고난이 떠올라서였다. 시상식과 방송사 인터뷰 등을 하면서 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는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눈물은 이미 말랐지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지난 4년간의 시간이 떠올라서 그랬다. 지금 우는 건 기뻐서"라던 그는 "오늘 결과는 오늘만 즐기고, 남은 경기 최선을 다하겠다"고 인터뷰장을 떠났다.

부끄럽지만 그에게 노래 한 소절을 들려주고 싶다.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 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 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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