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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모라토리움 파기 위협할 동안...한ㆍ미 계속 '딴 얘기'만

중앙일보

입력

북한이 새해 들어 네 차례의 미사일 발사에 이어 3년 가까이 지켜오던 모라토리움(핵실험ㆍ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유예)을 파기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도발이 잦았던 2017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엄포다. 이에 대응하려면 한·미 간 북핵 공조가 필수지만, 최근 한ㆍ미 외교당국 간 각급에서 이뤄지는 협의를 보면 오히려 양국 간 메시지 온도 차가 뚜렷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열린 당 중앙위 제8기 제6차 회의에 참석한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부청사에서 열린 당 중앙위 제8기 제6차 회의에 참석한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통화 잦았다고 강조...알맹이는?

최근 한국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 사이에는 북핵 수석대표(1월 5일, 11일) → 차관보(12일) → 장관(15일) → 1차관(19일) 등 연쇄적으로 유선 협의가 이뤄졌다. 특히 지난 15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통화한지 나흘 만에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과 또 통화했다. 외교부는 "한ㆍ미가 최근 고위급 협의를 연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을 향한 메시지의 결은 확연히 달랐다. 바이든 행정부는 최근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를 "도발(provocation)"을 넘어 "공격(attack)"으로 규정하고 추가 제재 등에 들어간 데 비해 정부는 "유감"과 "우려"만 반복하고 있는데, 고위급 협의 결과를 전하는 보도자료에서도 이런 차이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北 미사일에 美 홀로 "규탄"

19일 최종건 외교부 1차관-웬디 셔먼 부장관 통화 후 외교부는 "양 차관은 최근 북한의 미사일 연속 발사 상황을 공유하는 한편, 한반도 정세의 안정적 관리와 북한과의 조속한 대화 재개를 위한 모든 방안에 열려있는 입장임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반면 미 국무부는 보도자료에서 "셔먼 부장관은 ▶북한의 최근 탄도미사일 발사를 '규탄(condemn)'하고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 위반이며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논의했다"고 했다.

규탄과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는 내용은 미국 자료에만 있었고, 주어도 '양국 차관'이 아닌 '셔먼 부장관'이었다. 한국 자료에는 "양국 차관이 미사일 발사 상황을 공유했다"고만 돼 있다. 한국이 동참하지 않는 가운데 미국 홀로 규탄 메시지를 명확히 한 셈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이 지난해 10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렸던 이탈리아 로마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외교부.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왼쪽)이 지난해 10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렸던 이탈리아 로마에서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외교부. 연합뉴스.

韓 "대화 열려있어" vs 美 "..."

이런 양상은 앞서 15일 정의용-블링컨 장관, 11일 성 김 대북특별대표-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간 통화 때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 대한 '규탄'은 미국 측 보도자료에만, 미국 측 인사만을 주어로 포함됐다.

반면 외교부는 대북 대화 재개에 방점을 찍었다. "양국은 북한과의 조속한 대화 재개를 위한 모든 방안에 열려있는 입장임을 재확인했다"(19일 외교차관 협의), "양 장관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 방안에 대해 협의하였으며, 대화 재개를 위한 한·미의 노력에 북한이 조속히 호응해 올 것을 촉구했다"(15일 외교장관 협의), "양국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기로 했다"(11일 북핵 수석대표 협의) 등이다.

하지만 미국 측 발표에 이런 내용은 모두 빠졌다. 논의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보도자료에 우선적으로 담을 내용에 포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앞서 한ㆍ미 외교장관 간 직전 유선 협의였던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미 국무부 보도자료에는 "남북 대화와 대북 관여에 대한 미국 측의 지지"라는 표현이 포함됐지만 지난 15일 보도자료에는 '대북 대화' 관련 언급은 전혀 없었다.

북한이 모라토리움 파기를 들고 나선 것도 한·미 간 틈새를 노린 갈라치기 측면이 있다. 한국은 그간 북한이 모라토리움을 계속 지키는 데 대해 제재 완화 등의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미국은 북한의 행동 변화 없이 인센티브 제공은 없다는 입장을 확고히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를 '신뢰구축 조치 재고'로 표현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그간 "종전선언이 좋은 신뢰구축 조치"라며 신중한 입장의 미국을 설득해왔는데, 북한이 선제적으로 대미 신뢰구축 조치를 깰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부의 종전선언 추진 명분은 더 약해졌고, 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 추진해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북한의 고강도 도발 재개라는 초라한 결말을 맞게 될 우려가 커졌다. 그것도 한·미 간 이견만 확인한 채 말이다.

한편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은 20일 오전 7시 30분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해 문재인 대통령의 중동 3개국 순방 성과를 설명했다. 이에 앞서 북한 매체는 이날 새벽 6시쯤 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 결과 발표를 통해 모라토리움 폐기를 시사했고 내외신이 이를 속보로 내보냈지만, 해당 인터뷰에는 관련 질문도, 답변도 없었다.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이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과 회담 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외교부. 연합뉴스.

최종건 외교부 제1차관이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부장관과 회담 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외교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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