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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으로 본 세상](19) 이 땅의 지식인들이 고달픈 이유

중앙일보

입력

'와우~ 축하합니다.'

이곳저곳에서 축하 메시지가 울린다. 아버지는 연말 인사에서 전무로 승진하고, 아들은 졸업과 함께 직장에 취직했다. 딸은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경사, 경사다.

모두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 축하할 일이 생겼다는 건 또 누군가는 실패의 쓴잔을 마셨다는 얘기도 된다. 승진에서 탈락한 직장인, 졸업과 함께 취준생으로 전락한 청년, 입시에서 낙방한 수험생…. 경쟁 사회의 속성이 그렇다.

"아~ 난 왜 이리 안 풀리나..."

속상해 울고, 자책도 하고, 남을 원망도 한다. 낙방한 수험생 딸은 자기 방에 틀어 박혀 나오지도 않는다. 그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타들어 간다.

실패에 대한 반응은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 다르다. 기독교 교인이라면 '주님, 저를 어찌 쓰시려고 이러십니까?'라며 교회당을 찾는다. 새벽 기도로 주님의 품에서 안식을 구한다. 아멘~

불교도들은 '집착 때문이야….'라며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되새긴다. 수행으로 헛된 생각을 떨친다. 법당을 찾아 1천배를 올리기도 한다. 나무아미타불~

유가(儒家)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떨까.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 강해지려 노력한다. 쉬지 않고 담금질해야 한다. 내가 성실하지 않은 탓이라며 반성하고 완전해지려 노력한다. 그게 선비, 요즘으로 치면 지식인의 태도다.

오늘 바로 그 얘기다. 시련에 직면했을 때 유가적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가 주제다.

'택수곤' 괘는 물이 모두 말라 갈라진 연못 바닥이 드러난 형상이다. '곤궁'을 의미한다. /바이두

'택수곤' 괘는 물이 모두 말라 갈라진 연못 바닥이 드러난 형상이다. '곤궁'을 의미한다. /바이두

주역 47번째 '택수곤(澤水困)' 괘를 뽑았다. 연못을 상징하는 태(兌,☱)가 위에 있고, 물을 뜻하는 감(坎, ☵)이 아래에 있다(䷮). 마른 연못이다. 물이 모두 땅으로 스며들어 연못은 쩍쩍 갈라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 괘 이름이 역경, 빈곤, 곤궁 등을 뜻하는 '곤(困)'이다.

한자 '困(곤)'은 나무(木) 한 그루가 사방이 막힌 방(口)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나무가 잘 자랄 리 없다. 대학 시험에 떨어진 딸이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다.

'곤(困)'괘가 그려내는 곤궁함은 이렇다.

'困于石, 據于蒺藜, 入于其宮, 不見其妻'

'바위 사이에 낀 데다 가시덤불에 갇혔다. 집으로 돌아가니 아내도 보이지 않는다.'

온갖 풍상에 시달려 몸도 마음도 지쳤다. 집에 돌아와 아내가 해준 따뜻한 밥을 먹으면 위안이라도 얻으련만, 아내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보이지 않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시련이다. 삶 자체가 피곤하다.

요즘 한 종편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가 인기다. 홀로 산 생활을 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이 좋아 산으로 간 사람도 있지만, 부득이 산으로 가야 했던 사연도 적지 않다. 사회 경쟁에서 밀린 '실패자'도 있고, 사기를 당한 후 사람에 염증을 느껴 산을 찾은 사람도 있다. 지병 치료를 위해 산을 찾은 사람, 아내와 이혼하고 산으로 피신한 사람 얘기도 나온다.

그들을 산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던 상황, 그게 바로 '困(곤)'이다.

'臀困于株木, 入于幽谷, 三歲不覿'

'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니 엉덩이가 불편하다.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오랜 세월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택수곤' 괘의 첫 효사(爻辭)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듯하다.

주역 47번째 '택수곤(澤水困)'는 연못을 상징하는 태(兌)가 위에 있고, 물을 뜻하는 감(坎)이 아래에 있다. 괘 이름은 역경, 빈곤, 곤궁 등을 뜻하는 '곤(困)'이다. /바이두

주역 47번째 '택수곤(澤水困)'는 연못을 상징하는 태(兌)가 위에 있고, 물을 뜻하는 감(坎)이 아래에 있다. 괘 이름은 역경, 빈곤, 곤궁 등을 뜻하는 '곤(困)'이다. /바이두

주역은 그러나 '곤(困)'괘를 '형통하다(亨)'라고 개괄한다. 그렇게 힘든 상황을 그려놓고는 '亨(형)'이라니, 왜 그럴까?

조건이 있다.

'大人吉'

대인이라야 길(吉)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인은 어떡해야 하는가. 공자(孔子)의 해석은 명쾌하다.

'困而不失其所亨'

'곤궁함에 직면해서도 원래 가졌던 뜻을 포기하지 않으니, 형통하다'

소인은 곤궁한 상황에 직면하면 핑계 대고, 남 탓하고, 회피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대인은 결코 말로써 궁색함을 모면하려고 하지 않는다. 변명하지 않는다. 아무리 변명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有言不信)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성하고(有悔), 바름(貞)을 쌓고, 덕을 기를 뿐이다.

그러기에 공자는 '어려움에 직면해 봐야 덕이 있는 사람인지, 덕이 없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困, 德之辨也)'고 했다. 군자의 참모습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나타난다는 얘기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편은 '고궁(固窮)'이라는 단어로 이를 보충 설명한다.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군자는 궁색해지더라도 지조와 절개(志節)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소인은 곤궁해지면 못하는 바가 없다.'

소인은 핑곗거리를 찾으며 숨지만, 대인은 초지(初志)를 관철하기 위해 정면으로 대응한다. 하느님의 품에 안겨 안식을 구하지도 않고, 부처님의 자비에 마음을 맡기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강불식',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곤궁함에 맞설 뿐이다.

공자는 '어려움에 직면해 봐야 덕이 있는 사람인지, 덕이 없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困, 德之辨也)'고 했다. /바이두

공자는 '어려움에 직면해 봐야 덕이 있는 사람인지, 덕이 없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困, 德之辨也)'고 했다. /바이두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困(곤)'에 빠질 수 있다. 선(善)이 악(惡)의 세력에 밀려나고, 정의는 불의에 포위당한다. 대통령이 간신들에 둘러싸이면 국정은 문란해진다. 언로가 막히면 진실은 사방 막힌 방에 갇혀질식사 당하게 되어 있다. 모두 '困(곤)'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택수곤' 괘는 선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君子以致命遂志!'

군자들이여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절대 굴하지 말아라. 원래 가졌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노력하라!

유가적 삶을 살아가는 이 땅 지식인들의 삶은 그래서 더 고달프다.

한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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