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건 주의」로 빛 바랜 통일축구|부처간 공 다툼 일으킨「평양행」시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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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55년만에 부활된 남북통일축구대회는 북경을 밀행한 박철언 의원의 작품이었다.
박 의원은 남북축구대회가 무산될 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켜 성사시킨 장본인이었음이 북경아시안게임과 관련하여 북경에 체재하던 정부관계자 등 다수의 유력한 소식통들에 의해 밝혀졌다.
아시아법률협회 고문자격으로 북경대회조직위원회(BAGOC)의 초청을 받아 지난 9월21일 북경에 온 박 의원은 공항착륙부터 칙사중의 칙사대접을 받아 주목을 끌었다.
이날 장 백발 북경부시장의 영접을 받은 박 의원은 트랩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로 가장 먼저 북경공항을 빠져나가 취재진을 따돌렸다.
이 때문에 박 의원과 함께 왔던 정동성 체육부장관·고건 서울시장·박세직 전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장·김용래 전 총무처장관·조상호 전 체육부장관·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등 한국VIP들은 30여분간 기내에 대기해야 했다.
박 의원은 체류기간동안에도 숙소인 북경호텔에서 3개의 방을 잡아 주위의 시선을 피했고 한국VIP 중 유일하게 한국과 중국의 경호를 받아 그 비중을 실감케 했다.
박 의원은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며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박 의원의 활동은 9월23일부터 25일까지 불과 3일 동안 가장 두드러졌다.
9월23일 남북축구대회에 대한 세부적인 상황을 논의하기로 했던 정동성·김유순 남북체육부장관회담이 무위로 끝나자 박 의원이 뛰기 시작했다.
박 의원은 북경에 체류중인 이종옥 북한 부주석과 세 차례 접촉, 남북축구교류를 결행한다는 원칙이 극적으로 마무리됐다.
이에 따라 9월24일 귀국한 정 장관은 북경에 있는 장충식 한국선수단장을 통해 김형진 북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과 실무회담을 갖고 경기일정·선수단규모 등을 논의했다.
개인자격으로 북경에 왔다고 밝힌 박 의원은 북경에서의 활동에 대해『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고 스스로는 함구했으나 북한과 중국은 박 의원이 여전히 한국의 대통령과 직접 연결되는 핫라인이자 실세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체육교류가 국내관계당국의 내부조정을 거치지 않은 채 일부 인사에 의해, 독자적으로 밀 계에 의해 추구되고 한 건 주의의 영웅심리로 이루어졌다는 비판으로 파문을 일으켰고 그 후유증은 쉽게 사그러 들지 않을 전망이다.
청와대·체육부·축구협회는 이번 축구대회성사에 대한 공 다툼으로 불협화를 일으켰고 특히 남북교류의 첫 장을 열면서 체육부는 안기부·통일원·공보처 등 관계기관의 협의를 거의 배제, 우리측의 대북 교섭과 정책수행의 체제를 대 혼란에 빠뜨리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 정부 내와 사회일반의 지배적인 여론인 것이다.
더욱이 정 장관은 경기일정·보도진선정 등 중 차 대한 문제를『평양행 실현이라는 목표달성에만 집착한 나머지 졸속처리, 북측이 깔아 놓은「지뢰밭」에 빠지는 실수를 했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
남북축구대회는 지난7월말 북경 다이너스티컵 국제축구대회에 참가했던 김용균 체육부차관·김우중 축구협회장이 북한 강득춘 차관에게 공식 제의했고 북은 9월17일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해『남북축구대회를 하되 경기일정 등 세부사항은 북경아시안게임 남북장관회담에서 논의하자』고 통보했다.
통일원은 즉시 청와대로 보고했고 한 관계자의 발설을 통해 매스컴에까지 흘러 나갔다.
남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공 표된 것에 불만을 품은 북한은 북경 남북체육장관회담에서 이 합의의 파기를 위협, 남북축구교류는 무산될 위기로 치달았다.
이런 곡절을 겪으며 정 장관은 귀국 후 박 의원의 지원사격을 받아 장충식 단장을 공식창구로 북측과 접촉을 재개한 것이다.
장 단장은『당초 남북간에 합의된 6명의 보도진을 3배수로 늘려라』는 정 장관의 훈령을 받아 김형진 북측대표에게 이를 요구했다.
김형진 대표는『원래 약속과 다르다』며 장 단장의 요구를 거절했고 이 과정에서 남측은 북한이 월등히 우세한 여자축구를 추가하는 묘수를 제기, 여자축구가 평양에 가는 조건으로 보도진을 17명으로까지 늘렸다.
그런 가운데 정 장관은 협의 없이 독단으로 파견언론사를 선정함으로써 말썽을 증폭시켰다.
평양행 보도진은 계속된 북측과의 협의로 결국은 20명으로까지 증원, 당초의 체육부 측 교섭자세가 북측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양상으로 얼마나 허술했는지 잘 반증하고 있다.
결국「통일축구」는 한 개인 (박철언) 이 주도했고 거기에 정부의 한 부처(체육부)와 그 장관이 공명심으로 신중을 잃었으며 그 여파로 정부 부처간엔 불협화를 일으키고 만 사건이었다.
남북의 벽을 허무는 일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남북교류문제가 일부인사의 밀담과 독단에 의해 이루어져 북의 정치적 의도를 분별없이 수용하기만 하는 오류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방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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