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느낌] '추리닝' 입은 형님들 … 확 깨는 조폭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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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정범
출연:나문희·설경구·조한선·윤제문
장르:드라마
등급:15세

20자 평:열혈남아 위에 국밥집 엄마가 있다. 엄마를 통해 조폭영화를 반성하는 조폭영화.

'열혈남아'(9일 개봉)는 조폭영화의 관습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점이 단연 돋보이는 조폭영화다. 조폭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화려한 액션이나 검은 정장을 빼입은 건달들이 도열해 세를 과시하는 장면 따위는 여기에 없다. 대신 추락하는 인생에 대한 비유로서 조폭영화가 곧잘 그려온 비장한 정서는 이어받으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이 정서를 포착하는 계기가,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대상인 '엄마'라는 점, 그리고 이 엄마를 상투적이지 않게 그려낸 점은 이 영화가 칭찬받을 만한 대목이다.

성격도, 조직 내 지위도 별반 훌륭하지 않은 건달 재문(설경구)은 수년 전 동료를 죽인 것을 복수하러 다른 건달 대식(윤제문)의 고향에 찾아간다. 재문과 동행한 치국(조한선)은 아직 조폭이란 게 할만한 노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신참.

더구나 치국의 눈에 재문은 볼수록 용렬하고 야비한 인간이다. 재문과 치국은 사전조사차 대식의 엄마 점심(나문희)이 하는 국밥집에 들른다. 퉁명스러운 손님 접대로 시작된 점심과 재문의 관계는 점차 곱살궂은 정으로 바뀐다. 두 아들의 엄마로서 점심의 파란많은 사연을 짐작하게 된 재문은 그 아들 대식을 처치할 일을 두고 본격적인 갈등에 빠진다.

드라마에 방점이 찍힌 영화답게 배우들은 감탄할 만한 경지의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나문희가 연기하는 '엄마'는 흔히 헌신과 희생 일변도, 그래서 일차원적 캐릭터가 되기 쉬운 모성의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는 동시에 모성의 질감을 제대로 입혀낸다. 자식에게 보낼 옷가지랑 책 따위를 잔뜩 사들이고 희열을 맛보는 점심의 표정은 엄마 노릇에 담긴 인간적 욕망을 실감하게 한다. 느물대는 건달 재문을 연기하는 설경구 역시 마치 맞춤옷을 입은 듯하다. 조한선은 이들 곁에서 주눅들지 않고 제 몫을 해내는 것으로 연기 이력에 의미있는 걸음을 내딛는다.

일부러 황량하고 추레한 공간을 배경으로 택한 데서 보듯 이 영화는 조폭영화의 판타지를 차근히 부숴버리는 데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관객의 정서적 반응을 한껏 자극해도 좋을 만한 대목에서도 자제력을 발휘하는 단점이 있다. 재문을 둘러싼 과거의 디테일이 의도만큼 정교하게 표현되지 않거나 재문-점심에서 결국 재문-대식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리듬이 충분히 고조되지 못하는 데서 이런 아쉬움이 나오는 듯하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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