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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개봉동의 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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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개봉동의 비'- 오규원(1941~ )

천우사 약방 앞길

여자 배추장수 돈주머니로 찾아드는 비

땅콩장수 여자 젖가슴으로 찾아드는 비

사과장수 남자 가랑이로 찾아드는 비

그러나 슬라브 지붕 밑의 시간은 못 적시고

슬라브 지붕 페인트만 적시는 비

서울특별시 개봉동으로 편입되지 못한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의 실룩거리는 입술 언저리에 붙어 있는

잡풀의 몸 몇 개만 버려놓는 비



비와 함께 '나'는 배회한다. 별 할 일도 없이. 아웃사이더의 사치 중에는 이런 하릴없는 산보가 으뜸이다. 약방에서 자양강장제 같은 걸 하나 사 마셔도 좋다. 좌판 아지매의 돈주머니도 엿보고 젖가슴도 엿본다. 사과장수의 음탕도 엿본다. 그러나 스스로 소멸해가고 있다는 슬픔은 못내 지울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세속사의 언저리나 그저 돌아볼 뿐이다. '광명리의 실룩거리는 입술'은 그래서 마릴린 먼로의 아름다운 입술과 흡사한 것이기도 하다.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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