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나는 국가주의 망령(하나의 독일: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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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4제국」될까 주변국 불안/극우파인 네오나치스트들 동독쪽에서 준동/학자등 “독은 철저히 민주화됐다”우려 일축
독일이 강했을 때 유럽은 불행했다. 독일 제2제국과 제3제국은 인류 최대의 재앙인 두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이같은 역사적 경험때문에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는 주변국의 시선이 부드럽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통일이 「제4제국」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다.
『EC통합은 유럽을 집어 삼키려는 독일의 술책이다.』 영국의 리들리 전상공부 장관은 지난 7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발언,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언으로 그는 결국 사임하고 말았지만 독일의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독일의 통일을 가장 두려워하는 나라는 폴란드다.
전국토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슐레지엔지방과 솔리다르노시치(자유노조)의 탄생지인 그다니스크(독일명단치히)가 위치한 오스트프로이센(동프로이센) 지방이 1937년까지 독일영토였기 때문에 폴란드인들은 통일된 거대 독일이 영토반환 요구를 해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소련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다른 동유럽국가들과는 달리 폴란드는 통일독일과 폴란드간의 영토문제가 확고부동하게 해결될 때까지 소련군의 주둔을 오히려 요청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지난 12일 체결된 모스크바 「2+4조약」에서 오데르­나이세강선을 독­폴란드간 항구불변의 국경으로 규정했으나 폴란드인들의 불안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이밖에도 드러내놓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통일독일과 국경을 맞대게 되는 9개국 모두 독일의 통일에 대해 내심 우려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리들리 발언파문이 있었던 영국이나 독일과 유사 이래 가장 친한 사이가 된 프랑스 국민들도 독일의 통일에 대해 찬사보다는 우려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국들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기우」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알프레드 그로세르는 『오늘의 독일은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인들과는 다르다. 현재 독일인들은 진정으로 민주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통일을 주도한 서독은 지난 40여년간 독일 역사상 최초로 가장 완벽한 민주체제를 유지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독일은 일본과는 달리 나치의 잔재를 완전 청산했다.
안드레오티 이탈리아 총리 같은 사람은 『나치라는 박테리아는 독일인의 체내에서 완전 소멸됐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통일독일이 서독의 민주체제와 가치관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 확실한데다 과거와는 달리 EC와 나토라는 거대한 틀속에서의 통일인만큼 과거와 같은 불행이 재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통일무드에 편승,국가주의적 경향이 일부에서 꿈틀대고 있어 주변국은 물론 독일내부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7월 서독이 로마 월드컵 축구에서 우승했을 때 서베를린 중심가인 쿠어퓌르스텐담에 몰려든 젊은이들은 독일국기와 함께 비스마르크시대의 국기인 철십자와 독수리문장의 기를 흔들며 『도이칠란트』를 외쳐댔고 이날 한 베트남인은 이들에게 집단폭행당해 중상을 입었다.
또 요즈음 독일,특히 베를린 등 대도시를 찾는 한국인 등 유색인 관광객들에겐 『밤거리에서 스킨헤드족(빡빡머리)을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는 농반진반의 충고를 안내인들이 해주는 것도 국가주의의 출현을 예고하는 대목들이다.
네오나치스트로 불리는 이러한 극우파들의 준동이 특히 심한 곳은 동독쪽이다. 서독에서는 지난 83년 창당된 공화주의자당(Republikaner)이 극우파들을 결집,지난 1월의 자를란트주 의회선거에서 3.3%의 득표율을 올리는 등 정치권내에 수렴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얌전한」편이다.
그러나 최근 동독주둔 소련군에 대한 살인ㆍ방화 등을 자행하는 등 동독 극우파들의 테러행위는 나치의 최대죄악이었던 인종차별주의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이러한 일부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국가주의적 성향에 대해 베를린 자유대의 클라우스 마이어교수(역사학)는 『통일후 독일의 기성세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잘못된 국가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젊은 세대에게 계몽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베를린=유재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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