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정부 들어 살 만한 적 있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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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각된 소비심리가 반영된 듯 썰렁한 백화점 의류매장.

이코노미스트장사나 기업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경기 진단법을 체득한다. 소주가 잘 팔리면 불황, 맥주가 잘 팔리면 호황이다. 아동복 매출이 줄면 경기침체, 신사복 매출이 늘면 경기회복 신호다.

반면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고 립스틱이나 브래지어가 잘 팔리는 것은 불경기를 나타내는 길거리 지표로 통한다. 여성들은 경기가 나쁠수록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심리가 있어 미니스커트를 선호(치마길이 이론)한다는 것이다. 또 불황일 때 비싼 화장품이나 겉옷 대신 립스틱으로 화장 효과를 높이거나 브래지어 같은 속옷이라도 잘 입으려 든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속설이 반영됐는지 올 여름 미니스커트는 20㎝ 안팎으로 짧아졌고 인터넷 쇼핑몰의 상반기 최고 히트상품 대열에 올랐다. 그런가 하면 길거리에는 외환위기 때 재미를 보았다는 땡처리 전단이 다시 나돈다. 맥주는 독일 월드컵 기간에 반짝했을 뿐이고, 실업률에 정비례한다는 소주가 더 잘 나간다. 상인들에게 요즘 경기가 어떠냐고 물으면 “이 정부 들어 언제 괜찮은 적이 있었느냐?”고 되묻는다.

길거리 지표가 이럴 때 경제부처는 “경제 흐름은 여전히 견실하다”며 펀더멘털론을 들고 나왔다. 또 대통령은 “민생과 경제는 좀 다르다. 경제는 좋은데 민생이 나쁘다”고 했는데 결국 그 경제지표마저 나빠지는 모습이다. 3분기 경제성장률이 2분기보다 0.9% 늘어나는 데 그쳤다. 2분기에도 성장률이 0.8%였으니 2분기 연속 1%를 밑돈 것이다.

경제가 2분기보다 0.9%밖에 성장하지 않았다고 해도 손에 쥐는 것(수입)도 그만큼 늘어나면 그래도 수긍이 간다. 문제는 호주머니로 들어오는 게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그 전보다 오히려 적다는 점이다. 생산(국내총생산·GDP)은 0.9% 늘었다는데 이를 소득(국내총소득·GDI)으로 바꿔 보니 오히려 0.2% 줄었다. 국제유가 오름세와 환율 변동을 반영해 따져본 결과다.

애써 수출하지만 제값을 못 받는데다 더 비싼 값에 원유와 물건을 들여오다 보니 교역을 통해 손실(3분기 18조7965억원)을 보았다. GDI는 1분기에도 마이너스(-0.4%)를 기록했다. 이런 지경이니 성장도 부진하지만 체감경기는 더욱 나쁘게 다가오는 게다.

소득이 줄어드니 지갑을 그 전만큼 열기도 힘들다. 3분기 민간소비는 2분기보다 0.5%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1분기 이후 가장 낮은 것이다. 2003년부터 우리 경제를 짓눌러온 민간소비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회복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성장률도 조금 높아지나 했는데 이내 힘을 잃고 만 것이다.

살아나는 듯했던 민간소비 증가세가 탄력을 받지 못한 것은 체감경기가 계속 악화된데다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다. 9월 중 취업자는 2333만 명으로 1년 전보다 28만2000명 늘어나는 데 그쳤다. 월별 취업자 증가 폭은 4월 30만7000명을 기록한 뒤 석 달 연속 20만 명대에 머물다가 8월에 30만 명대로 회복하더니만 한 달만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가면 정부가 목표로 삼은 35만 명 일자리 창출은커녕 30만 명 달성도 힘들어 보인다.

생산과 소비, 고용이 줄어들거나 증가 폭이 그 전만 못하다. 어느새 한국 경제는 ‘성장 둔화→소득 감소→소비 위축→성장 둔화 가속’의 악순환에 빠져든 느낌이다. 뒤늦게 이들 경제지표를 읽었음인가? 권오규 경제부총리가 10월 20일 현 경제 상황을 “사실상 불황”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학기 성적이 나쁘더라도 다시 해보겠다는 의욕이 넘치고 여건도 괜찮으면 다음 학기 성적을 높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경제를 보면 핵심 경제주체인 기업과 가계의 의욕부터가 약하기 그지없다.

경제의 수원지 역할을 해야 할 제조업의 경기실사지수(BSI)는 4월에만 기준치 100(‘호조’ 응답업체와 ‘부진’ 응답업체가 같음)에 근접한 97을 기록했을 뿐 6월부턴 미끄럼을 타 80선에서 움직였다. 10월 전망 BSI가 90으로 올라섰지만 조사 시점이 9월 15∼22일로 추석 전인데다 북한 핵실험에 따른 불확실성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가계 소비심리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4분기와 올 1분기 기준치 100을 넘어서며 모처럼 성장에 기여하나 싶더니 2분기부터 꺾였고 3분기에는 다시 100 아래로 떨어졌다. 소비자심리지수 조사 시점도 9월 1∼14일로 추석 이전이다. 이 같은 BSI와 소비심리는 기업투자와 민간소비를 위축시킬 수밖에 없다.

기업 하는 마음과 소비심리가 허약한 판에 북핵 사태와 엔화 대비 원화환율 급락 등 한국 경제를 둘러싼 주변 환경도 좋지 않다. 배럴당 70달러를 넘어섰던 국제유가가 떨어진 게 그마나 다행이지만 북핵 사태와 환율 급락은 우리 힘으로 어쩌기 힘든 외부 변수다.

내수가 부진한데도 경제성장을 떠받쳐온 것은 수출이다. 그러나 매달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하던 수출도 3분기 이후 증가세가 둔화되는 모습이다. 9월까지 상품수지 누적흑자는 189.4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4억 달러나 줄었다.

3분기 성장률을 1년 전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4.6%. 3분기만에 다시 5% 아래로 떨어졌다. 추석 연휴가 지난해에는 9월(3분기), 올해는 10월 초(4분기)라서 전년 동기 대비 GDP 증가율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나는 효과를 보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10월 초 최장 9일에 이른 추석연휴 이동이 분기별 성장률에 미치는 영향은 최대 0.5%포인트다. 이런 판에 북핵 사태까지 터졌으니 정부가 목표로 한 올해 5% 성장은 아무래도 어려울 성싶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대부분 올해 연간 성장률을 4%대 중반으로 본다.

더구나 경기를 반영하는 10개 지표의 전월 대비 증감률을 가중평균해 구하는 경기선행지수를 보면 경기는 이미 하강 국면임을 보여준다. 지수가 전달보다 올라가면 경기 상승, 내려가면 경기 하강을 나타내는데 2월부터 7개월째 내리막이다. 과거 경험상 6개월 연속 하락하면 경기가 실제로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었는데 7개월 연속, 감소 폭도 0.4∼0.5%포인트로 크므로 침체 정도가 아닌 ‘사실상 불황’이란 진단이 나온 것이다.

문제는 내년이다. 민간 경제연구소는 물론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마저 내년 성장률을 4.3%로 내다본다. 일부 민간 연구소에선 북한 핵실험에 따른 한반도 위기 상황이 장기화해 소비와 투자 위축이 더욱 심해질 경우 성장률이 3%대 이하로 급락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경상수지도 올해까진 흑자를 내겠지만 내년에는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불황에 대해 재치있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경기침체(recession)는 당신의 이웃이 일자리를 잃는 것이고, 불황(depression)은 당신이 일자리를 잃는 것이다”라고. 80만 실업자 중 절반이 청년실업자다. 얼마 전까지 자식 대학입시를 걱정하던 부모들이 요즘은 취업 걱정에 한숨짓는다.

불황의 늪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경기를 끌어올리겠다는 정부 방침은 늦었지만 맞는 방향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다. 적자 국채를 찍어서라도 재정을 확대하고 그 집행을 앞당겨 일시적으로 성장률을 높임으로써 내년 대선에 써먹자는 잔꾀 대신 경제체질을 바꾸는 게 옳다. 규제를 확 풀어 기업들의 경제 하려는 마음을 북돋아 일자리를 더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봉급생활자들의 지갑이 두꺼워져 소비가 늘어나고 경기도 좋아지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양재찬 이코노미스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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