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신뢰구축은 쉬운 일부터(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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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구구절절이 옳은 말들이다. 고위급회담 첫날 남북한 총리가 밝힌 민족대화합을 위한 방안들은 표현 하나하나 자구 하나하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들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분단후 처음 가진 총리회담이니 만큼 서로가 성의를 다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공식입장을 종합한 제안들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남북한 총리의 기조연설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자 한다.
물론 제기된 문제들에서 대화의 우선순위,해결방안에 대한 접근방법 등 문제인식의 시각이 다른 점이 두드러지고 있다. 우리측 연설내용이 신뢰회복을 위한 다각적 교류를 주조로 하고 있는 데 반해 북한측은 정치ㆍ군사문제 해결을 집중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대로 양측의 기본입장은 종전과 다름 없음이 거듭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회담은 그런 입장의 차이를 또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그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번 회담에 기대를 거는 것은 당장에 제기된 문제를 풀자는 데 있다기 보다는 이러한 입장의 차이를 우선 확인하고 그 바탕에서 접근가능한 부분부터 지혜를 모아 풀어보자는 데 의의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지혜를 모으는 실마리로서 우리는 양측 총리의 기조연설에 나타난 몇가지 눈에 띄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 첫째는 제안내용들이 종전의 것들이 포괄적이고 어느 정도 막연했던 데 비해 좀더 구체적이면서 정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앞으로의 대화에서 접근점을 모색하는 기초자료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두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제안을 구체화하다 보니 단계적 방안들 중에 공통된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상호비방 중지,고위 군당국자간의 직통전화 설치,불가침선언,비무장지대의 명실상부한 평화지대화 등이 그러한 부분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분들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싶다. 물론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제안중 어느 한 단계만 따로 떼어 합의하기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중 몇가지는 어려운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실현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남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나라도 합의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사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러한 작은 합의를 바탕으로 논의하다 보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도 조성되고 큰 문제를 다룰 신뢰감과 자신감도 갖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북한측이 과연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문득 걱정을 하게 된다. 아직도 북한측이 남한의 실체라는 현실 인정을 꺼려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를 북한측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우리측의 수석대표를 「총리」라 호칭하지 않고 줄곧 「선생」으로만 부르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한측이 그러한 불합리한 자세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또 비록 구체적 성과가 없더라도 적어도 어느 일방에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없이 대화를 계속해나갈 성실한 의향을 서로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유익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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