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의 하늘은 무슨 색이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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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일반 선수들이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역주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시각장애인 정운노씨(왼쪽)가 양봉승씨의 도움을 받으며 밝은 표정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 나이로비=권혁재 기자

정운노(35)씨는 앞을 보지 못한다. 백내장으로 12세 때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잘 뛴다. 올 전국체전 장애인 육상 400m.800m.1600m에서 은메달 3개를 땄다. 2001년 육상을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적이다. 그가 해발 1700m 아프리카 고지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다. 29일(한국시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펼쳐진 '스탠다드차타드 지상 최대의 레이스(GROE)' 마라톤 대회에 나선 것이다. 그의 입을 빌려 이날 레이스를 재구성했다.

도우미 양봉승씨와 완주

"보이지도 않는데 아프리카에서 뛰는 거 하고 서울 남산에서 뛰는 거 하고 무슨 차이가 있지?"

"공기가 다르잖아."

문득 며칠 전 친구와 주고받은 말이 생각났다. 고지라 그런지 숨이 더 찼다. 몽롱하니 현기증도 느껴졌다.

"운노야, 20m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고, 돌자마자 언덕길이 시작돼."

도우미 양봉승(46.SC제일은행 마라톤 동호회원)씨의 말이 들렸다. 팔과 팔을 이은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낀 양씨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런 거 말고요…. 케냐의 하늘은 무슨 색이죠?"

우리는 3월부터 호흡을 맞췄다. 은행 부지점장으로 일하는 양씨가 토요일마다 연습 장소인 남산으로 왔다. 우리의 팔은 끈으로 연결돼 있다. 끈의 당김과 풀림으로 서로의 감정과 컨디션을 읽는다. 도우미는 레이스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나는 그의 말을 통해 코스를 읽고 세상을 본다. 케냐의 하늘은 서울보다 파랗다.

나흘 전(25일)에 케냐 땅을 밟았다. 적도에서 100km 남짓 떨어진 곳이라는데, 고원의 공기가 뜨겁지 않았다. 도착 이튿날부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여러 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몸이 많이 긴장한 것 같다. 보이진 않지만 다른 감각은 날선 칼처럼 예민하다. 6시간 시차 때문에 더 힘들었다. 이곳 새벽, 그러니까 한국의 낮에 나는 늘 깨어 있었다.

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장애인올림픽 유도(60kg 이하)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94년 장애인 학교를 졸업한 뒤 운동을 그만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안마 업소에서 일하며 먹고 잤다. 6년을 그렇게 보냈다. 57kg(1m64cm)이던 몸무게가 70kg까지 불었다. 묵직하게 잡히는 뱃살이 싫었다. 뛰기 시작하면서 몸무게가 63kg까지 빠졌고, 늘어졌던 삶도 탱탱하게 살아났다.

끝없이 이어지던 양씨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35km 지점인가. 다리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로비의 울퉁불퉁한 차도는 더 거칠게 느껴졌다. 발밑에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하면서 체력도 급격히 소진됐다. 쓰러졌다.

"이제 한 5km만 가면 돼. 저기 앞에 빨간 옷 입은 뚱뚱한 흑인 아저씨 뛰어간다. 저 사람 잡자."

양씨의 목소리가 나를 일으켜세웠다. 나이로비의 메케한 매연 냄새와 지천으로 피어 있는 자카란다(보라색 아카시아) 향기, 케냐 사람들의 독특한 몸냄새가 다시 코를 자극한다. 발에 푹신한 쿠션이 와 닿는다. 경기장 트랙이다. 마지막 결승선만 남았다. 기록은 4시간45분.

"중간에 쓰러지고도 다시 일어나서 뛰었잖아. 대단해." 양씨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이로비(케냐)=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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