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농촌/실패한 공산주의 “후유증”심각(해외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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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자본주의 낯설어 가치관 혼돈/“땅 받기 싫다”겁먹어/농기계 사는일등 당장 돈드는 게 걱정
급격한 정치ㆍ경제의 변화가 밀어닥치고 있지만 동구의 스탈린주의식 농업경제는 아직도 개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구농민들은 시장경제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경제실험속에서 가치관의 혼돈과 모순을 겪고 있다. 체코의 한 집단농장 경영자는 아이아코카의 자서전에서 그럴듯한 구절들을 뽑아 농장 게시판에 붙여놓고 있지만 그 자신은 공산당에 그대로 소속돼 있다. 불가리아에서의 한 농장에서는 여전히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지만 농장경영자는 공산당을 탈당하고 농민당에 가입했다.
동구농부들이 밀대신 슈퍼마킷에서 산 빵을 돼지사료로 쓰게 했던 정부보조금은 곧 사라질 예정이다. 폴란드의 경우 1년전 우유 1ℓ 판매한 돈으로 덩어리 사료 2.5㎏을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0.5㎏밖에는 살 수 없게 됐다. 루마니아에서는 외화부족으로 현대화된 농기계를 구입할 수 없어 골동품 장비로 농사를 짓고 있고,불가리아 집단농장의 수의사는 서방으로 이민을 떠나고 있다.
동구 농촌문제의 핵심은 토지소유권의 향방이다.
동구 각국은 폴란드를 제외하고 공산화 직후 집단농장화 과정을 겪었다. 농부들의 반발과 희생을 무릅쓰고 강행된 집단농장화는 50년대 중반 거의 완료됐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이 집단농장의 소유권이 문제가 되고 있다.
불가리아를 제외한 모든 동구국가들에서 농토는 농민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집단농장을 소속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선 많은 농민들 스스로가 농토를 되돌려 받기를 원하지 않는듯한 분위기다.
그들은 집단농장의 일원으로 있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트랙터에 앉아 하루 8시간만 일하면 결과에 책임질 필요없고,평생직장을 잃을 염려가 없는 현재의 생활에 불만을 갖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리아 선거에서 사회당(전 공산당)이 농촌에서 압승을 거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토지반환을 내걸었던 농민당은 겨우 8%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농민들로선 토지를 돌려 받았을 경우 농사를 짓기 위해 필요한 돈을 빌려야 하고,창고ㆍ축사 등 건물을 지어야 하며,농기계를 사는 일 등 엄청난 생활의 변화를 겪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밝은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이들에겐 「소유권」의 개념이 희미해졌다. 40년동안 그들에게 땅은 그저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농토일 뿐이었다.
토지소유권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동구농업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산넘어 산이다.
동구 각국의 정당은 거의 예외없이 각종의 정부보조금이 폐지돼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농민들에겐 한마디로 나쁜 소식이다. 농산물가격이 오르면서 수요는 줄어들고 농민들이 구입하는 비료ㆍ연료ㆍ사료값은 폭등함으로써 농민들이 남길 수 있는 이익 폭은 급격히 줄게 된다.
농업생산성도 크게 떨어진다. 곡식과 고기 생산은 EC의 50∼75%에 불과한 수준이다.
기계장비의 낙후는 최악의 상황이다. 비교적 형편이 괜찮은 헝가리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에서 농업장비 생산설비에 대한 투자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기술수준이 빈약해 고장이 잦고 부품공급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동구농업의 미래가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동구의 농토는 토질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독의 마그데부르크 평원의 토질은 유럽 최고이며,루마니아 동부와 불가리아의 흑토는 소련 우크라이나 지방의 토질에 비해 손색이 없다.
또한 스탈린주의의 유산중 단 한가지,경작규모가 크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최소 1천5백㏊ 이상되는 경지가 산산이 쪼개져 농민들에게 분배돼 흩어지지 않는다면 EC의 소규모단위 농가들보다는 미래에 적응하기가 쉬울 것이다. 잠재력은 엄청나게 크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력이 발휘되려면 몇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프랑스 한 관리가 헝가리의 한 국영농장을 방문해 농사장비를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농장지도자로부터 불쾌한 반응을 받게 됐다. 『우리를 제3세계 국가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장비가 아니라 농산물 거래다.』
이 에피소드는 동구농업이 처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동구농업이 이 「공산주의 실험의 실패」로부터 회복하기까지는 최소한 10년의 세월은 흘러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강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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