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도살은 곧 인간파괴”/이시형 고려병원ㆍ신경정신과과장(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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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약은 물론이고 술ㆍ담배를 즐기는 사람을 정신의학에선 만성자살로 간주한다. 어려운 정신분석 이론에서 나온 해석이 아니다. 조금만 길게 생각하면 이건 아주 간단한 귀결이다. 명대로 살지 못할걸 뻔히 알면서 계속 한다면 자살로 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는 자신은 물론 가족도 끝내 무너지고 만다. 나도 죽고 가족도 죽인다. 마약 한대,술 한 잔 속엔 자살ㆍ타살의 무서운 살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억울한 건 선의의 피해자인 가족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사회는 마치 전체가 만성 자살에의 길로 치닫고 있는 느낌이 든다. 길에 나서면 모두들 살기등등이다. 작은 일에도 핏대를 올리고 싸운다. 한치의 양보도 없다. 줄은 서 뭘해,먼저 설치는 사람이 먼저다. 그러다 결국 아무도 못간다. 교통 전쟁이 걸핏하면 육탄전으로 발전한다. 한길에 차를 맞대놓고 삿대질하는 광경은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급한 마음엔 신호도,규정도 없다. 「나 먼저」라는 급한 생각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나 말이다. 더위와 함께 중추신경의 공격증후가 극도로 자극된 상태에 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사생결단이다.
약은 사람들도 있다.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는 기교파다. 부정식품을 살인죄로 다스리겠다지만 만드는 입장에서야 나만 안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꼬리 긴 여우는 잡히게 마련이다. 공해 물질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소경 제닭 잡아먹는 꼴이다. 자기라고 물 안마시고 살 수 있나. 이 역시 죽기로 작심한 배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이다. 당장 죽지 않는다고 안 죽는 건 아니다. 사람은 모질어서 그래도 잘 견딘다. 하지만 만성피로감,생기없는 얼굴,걸핏하면 설사ㆍ감기 등 서서히 시들어져 가고 있다. 만성 자살의 징후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자살이 아니라 살인이다.
물론 술 한 잔에 당장 죽진 않는다. 그걸 맹신하고 있는 정부의 미련함이 환경정책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도심의 작고 큰 산봉우리는 송충이보다 더한 인충이 야곰야곰 다 갉아먹고 숲이라야 겨우 상투 마냥 꼭대기에 남아있다. 걸핏하면 그린벨트 해제,공원개발,체육시설 어쩌고 하면서 겨우 몇그루 남은 나무를 뿌리째 넘본다. 도심의 공기오염은 이미 한계를 훨씬 넘어섰다. 한그루 더 심을 생각은 않고 갉아먹을 계산만 하고 있다. 앞으로 해마다 닥칠 선거선심에 또 얼마나 잠식당할는지 그저 숨이 막힌다.
겨우 천리밖에 안되는 이 좁은 땅덩이,잘 사는 사람,못사는 사람,다함께 여기서 살아야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 모두 사는 이땅을 고이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아껴야 한다. 좀 더 멀리,넓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공해에 말라 죽고,그리고 치어까지 잡아먹은 근해 어장엔 이제 고기 씨마저 말라 버렸다. 자원은 무한정이 아니다. 자연을 아끼고 가꾸어야 그 열매가 결국 우리 인간을 살찌우게 하는 것이다.
항상 겸허하고 감사한 마음을 잊어선 안된다. 그러한 심성으로 자연을 대해야 한다. 잔인하게 소와 개에 물을 먹여 도살하는 잔혹한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인간을 파괴하고,그리고 자연마저 이렇게 철저히 파괴할 수 있을까. 언제부터 우리 심성이 이렇게 잔인한 살기로 가득차게 되었을까.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게 모두 나만 잘 살겠다는 극단의 이기주의가 빚은 단말마적 현상이다. 대중을 볼모로 나 하나 편하기 위해,나 하나 잘 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부동산 투기가 휩쓸고 간 언저리엔 방 한칸으로 칼부림이 일어났다. 자살도 있었다. 이건 살인이다.
내가 벌어 내가 쓴다지만 그러한 소비풍조가 결국 대중에 만연되지 않았던가. 너도 나도 벌기보다 쓰기에 열을 올렸으니 우리경제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오죽하면 외국사람이 우리살림을 걱정하고 있을까. 생산현장엔 근로의욕이 떨어졌고 사장은 수출보다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도마뱀 제꼬리 잘라 먹고 있는 꼴이다. 얼마나 벌어놓았다고 쓰기만 할 작정인가. 이러다간 모두 망한다. 우리는 지금 서서히 가라앉고 있다. 한국호는 지금 침몰 일보직전이다.
너는 죽어도 나만 잘 살기엔 우리땅이 너무 좁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그렇게 엉켜있다. 끝내 나도 망한다. 싫어도 더불어 함께 살지 않으면 안될 운명을 함께 타고난 우리다. 잘 산다고 교만할 수도 없고 못산다고 억지로 밀어붙이는 응석도 그쳐야 한다. 서로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감사한 마음이 절로 우러날 것이다. 내게 일 자리를 준 사장에게 감사하고 나를 위해 일해주는 직원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에게 서로는 고마운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고마운 마음이 들면 미안한 생각이 절로 든다. 휴가를 즐기는 피서객도 들판의 농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도 그걸 줍는 사람을 보면 미안한 생각이 들 것이다. 사장이 한푼을 써도 직원들이 밤새워 번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미안해서도 함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가슴 가득 고마운 마음 뿐일 것이다. 누가 사치를 하고 누가 허영을 부릴 건가. 서로 위하는 마음이 생길진대 미안해서도 그럴 수가 없으리라.
우리는 정이 많은 백성이다. 메말랐다지만 천만에다.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에 갇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오래 간직되어온 이 고운 심성을 살려야 한다. 미안한 생각,고마운 마음을 다시 한번 새겨봐야 한다. 그것만이 이 살벌한 거리,만성자살로 치닫는 사회병을 치유하는 길이다. 혼자 잘 살기엔 너무도 좁은 땅이다. 소경 제닭 잡아 먹는 우도, 도마뱀 제꼬리 잘라 먹는 우도 범하지 말아야겠다. 그러기에는 우리는 너무 가까이 엉커있다. 함게 잘살아야 한다.
이 더운 여름,나를 걷게 하지 않고 태워주는 버스ㆍ택시기사에게 어찌 감사의 염이 우러나지 않는단 말인가. 불같은 교통지옥속을 헤짚고 다니면서 그래도 시민의 발이 되고자 땀을 흘리는 그분들에게 어찌 미안한 생각이 안들 수 있으리요. 내 차를 타준 손님도 고맙다. 시원히 모시지 못해 미안하다. 이런 생각들이 서로의 마음에 오갈때 무엇 때문에 핏대를 올릴 일이 생길 건가. 내가 잠든 사이 새벽길을 달려 배달된 신문ㆍ우유,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미안한 생각,고마운 마음,가슴 가슴마다 이런 마음으로 가득할 때 여름 한더위도 뜨겁지 않으리라. 살기등등한 거리엔 정겨운 웃음으로 넘칠 것이리라.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 없다. 더불어 함께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만성자살에의 잔인한 유혹을 씻어내고 미안한 생각,고마운 마음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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