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 멍들게 하는 과소비 풍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오늘도 변함없이 감미로운 멜러디와 함께 즐거운 점심 시간이 시작되었다.
점심 시간마다 틀어 주는 교내 방송, 『학생 여러분, 어머니께서 정성껏 싸준 점심을 먹을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가집시다….』
쇼팽의『즉흥 환상곡』이 울려 퍼지고 난 뒤 정규 방송의 하나인 분실물 습득 광고가 이어졌다.
『○○회사 제품의 운동화 3켤레, 실내화 5켤레, 도시락 1개, ○○시계, 물 건너 온 시계, 노랑 바탕에 은색줄 시계, 필통 3개….』
분실물 방송이 끝난 10여분 후에 우리반의 김군이 울먹이며 나를 찾아 왔다. 잃어버린 시계를 찾으러 방송실에 갔더니 같은 반의 이군이 이미 찾아갔다는 것이다.
이군한테 가서 시계를 보자하니 보여 주지도 않고『사람을 뭘로 보느냐』며 윽박 지른다는 것이다.
이군을 불러 물어 본 즉, 역시 자기 것이라 고집을 부린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진무구한 아이들의 얼굴은 사라지고 먹구름이 낀 하늘만 보인다.
『너희들 각자 자기 시계라는 증거를 대라』는 말이 떨어지자 김군은 재빠르게 교무실 밖으로 나가더니 자기 짝궁을 데리고 와서 확인시킨다. 이때 이군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글썽거린다. 김군을 밖으로 보내 놓고 이군과 조용히 대화를 시작했다. 『이군, 왜 그랬니 응?』눈물을 닦는 눈언저리에는 때꼬장물이 널브레하다. 손수건을 꺼내 닦아준 뒤에야 말문을 연다. 같은반 박군이 시켰다는 것이다.
박군이 여럿이 있는 곳에서 김군 시계를 줍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방송실에 갖다 주었으니 『네가 가서 네 것이라고 찾아와 나에게 달라』고 애원반 협박반 부탁하더라는 것이다. 가난한 박군은 시계가 없다.
학교 방송실에는 주인 잃은 물건들이 미처 보관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쌓여 있다.
유명 메이커의 운동화, 그리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고급 시계, 아직도 새것인 도시락…. 갖가지 물건들의 주인은 분명 학생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넉넉한 생활이기에 매일 방송을 듣고도 찾아가지 않는다는 말인가.
시계 한번 차보고 싶어 자기 양심을 속인 박군을 꾸중해야 할지 가슴이 저려오기만 한다.
요즘 학생들은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한번 잃어버리면 찾는 법이 없다.
동료 교사의 얘기다. 어느날 종례를 마치고 교실문을 나오는데 어떤 학생이『선생님, 얘가 시계 잃어 버렸대요』하고 친구를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방송실에 가 보았니?』하고 물었더니『창피해서 안 갔어요. 엄마보고 새로 사달라고 하면 돼요. 괜찮아요 선생님』하더란다.
학생 손을 잡아끌고 방송실에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계는 주인 없이도 열심히 잘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허공을 보고 웃어 버릴 힘도 없다. 이 같은 현상은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무분별한 애정과 물질 만능주의, 허례 허식에서 온 과소비 풍조가 빚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시계 하나쯤 다시 사 주는 거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고 방식들, 2∼3개월만 지났어도 새로운 유행 옷·신발을 사 입히는 자기 과시적인 허영, 이런 것들이 사회를, 자녀들을 멍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군의 행위는 물론 나쁘다. 그러나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운 생활인데 어찌 부모에게 손목 시계 사달라고 손을 내밀 수가 있겠는가. 호의 호식하며 유행 따라 사는 친구와 자기 자신을 비교할 때 어찌 그의 심성이 고와질 수 있겠는가. 박군을 꾸짖기보다 오히려 위로해 주고 싶은 심정인 나는 형편없는 교사일까.【정인관<서울 당산중 교사·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