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세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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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셋이서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길을 잃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셋중 두 사람이 길을 잃으면 애만 태우고 목적지를 찾아가기 어렵다. 길을 모르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가. 온 천하사람들이 길을 잃고 있으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장자』에 나오는 얘기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을 2천수백년전 장자가 미리 내다보고 한 말 같다. 요즘 신문을 보면 정말 길을 아는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온 국민이 하루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수도물 하나를 놓고도 중금속 유해물질이 들어 있느니 마느니 시비가 그치지 않는다. 감독책임을 맡은 공무원은 당연히 국민의 편을 들만도 한데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많은 공해연구기관의 조사는 덮어두고라도 정부 감사원의 보고자료조차 본체도 하지 않는다.
공해문제는 마땅히 공해의 근원에서 문제를 추적해야 한다. 그러나 공해물질을 버젓이 버리는 쪽은 태연하고,공해의 결과만을 문제삼는다. 아마 지금쯤 공해물질을 버린 쪽은 저편에서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세태는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도 고맙고 황송하다. 까닭없이 빼앗기고,피 흘리고,죽는 일들이 너무 많다. 엊그제는 7세 유치원생을 인질로 돈을 챙기고 그 어린이의 목숨까지 빼앗은 20대 여자유괴범이 우리의 마음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고 스톱」 화투는 이제 국민적인 놀이가 되었다지만 번드르르한 주부들이 벌건 대낮에 몇억원대의 판을 벌이는 것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나마 「사기도박」이 횡행하는 세태는 그 범인보다 주부들의 얼굴을 보고싶게 만든다.
요즘 뇌물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고급관리들은 천만원대의 뇌물을 무슨 코끼리 비스킷 정도로 여기는가 보다. 김선달이 따로 없다. 그보다 더 가공할 일은 공연히 걸린 사람만 재수없고 억울하다는 시정인들의 반응이다.
먹고 마시고 숨쉬는 일에 마음 놓을 수 없고,어른 아이 따로 없이 길거리 걸어다니는 일이 겁나고,사람 목숨이 검불같고,국민이 낸 세금은 공직자의 쌈지돈처럼 쓰이는 세태다.
이런 세상을 두고 길을 잃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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