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저우 한국영사 협박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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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나라 외교관이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에게서 외교 기밀을 넘기라고 협박을 당한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 수십 차례 e-메일과 전화 협박=13일 외교부.경찰청 등에 따르면 중국 광저우(廣州)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김모 영사는 올 3~8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으로부터 "재외공관 암호처리 시스템을 넘겨 달라.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과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내용의 e-메일을 13차례 받았다. 6월부터는 휴대전화로 "메일에 왜 대답이 없느냐. 당신 친구가 서운해 하고 있다"며 수차례 협박했다는 것이다.

재외공관 암호처리 시스템은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들과 정보기관 요원들이 국내 본부와 연락할 때 보안을 위해 통신문을 암호화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암호체계가 다른 나라에 흘러들어가면 해외 공관과 국내 본부가 주고받는 기밀 정보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김 영사는 첫 협박 e-메일을 받은 즉시 외교부에 보고했고, 국가정보원과 경찰청이 자체 수사에 나서는 한편 중국 공안당국에 협조를 요청한 상태다.

경찰이 e-메일 발신지를 추적한 결과 13건 모두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지역에서 발송된 것으로 나타났다. 협박 e-메일은 열어볼 경우 해당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빼낼 수 있는 해킹 프로그램이 교묘히 숨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협박에 여러 사람의 명의로 가입한 e-메일과 휴대전화가 사용돼 몇 명이 범행에 가담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고 전했다. 김 영사를 협박하는 데 사용한 e-메일과 휴대전화는 아프리카 주재 공관원 등 외교부 소속 직원 4명의 명의를 도용해 중국에서 가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정원은 "현재까지 해외 암호 시스템이 유출된 흔적은 없다"고 밝혔다.

◆ 북한의 소행인가? =정부는 범인이 금품 대신 기밀정보를 노린 점 때문에 단순 협박이 아니라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보고 있다. 특히 e-메일이 한글로 작성되고 우리말로 협박전화를 건 사실로 미뤄 북한 공작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 영사는 "협박전화는 중국동포나 북한 주민 말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3국의 정보기관이 개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한국 관련 정보를 가장 원하는 쪽은 북한보다 중국이다.

중국 정보당국이 중국동포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김 영사의 휴대전화에 찍힌 발신자 번호와 e-메일 발신처 등을 추적, 범인의 신상을 상당 부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측은 우리에게 범인의 국적 등 구체적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있다.

◆ 약점 잡혔나? =김 영사가 받은 협박 e-메일엔 "과거처럼 협조를 잘해달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사정당국은 김 영사가 북한 등에 약점을 잡혀 이전부터 정보를 제공했는지를 집중 조사하고 있다. 김 영사는 광저우 총영사관과 외교부 본부 간에 오가는 외교 전문(電文)의 암호 처리를 담당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영사는 "부임 2년2개월 동안 북한 사람과 접촉한 적이 없다. 당연히 이들에게 약점을 잡힐 일 없다"고 부인했다. 김 영사의 주재지엔 북한 영사관이 없고 무역대표부만 있기 때문에 이들과 업무상 겹치지 않는다는 설명도 했다. 김 영사는 과거 주로 중동지역에 근무했기 때문에 북한 인사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선양은 중국동포(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북한이든 중국이든 선양에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공작원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 관계자는 "협박범들이 신분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김 영사의 주재지와 멀리 떨어진 선양에서 공작한 걸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홍콩=최형규 특파원,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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