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가는 미국의 대한 경계심/정정길(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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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인들이 과거와는 달리 소련을 제치고 일본을 제1의 가상적국으로 안식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최근 나온 일이 있다. 심각한 무역마찰이 10여년간 계속되자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동구공산권이 허물어지면서 불과 1,2년새에 세계정세는 이념대결의 시대에서 경제대결의 시대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급변하는 속에 미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당연히 변화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변화를 정확하게 미리 파악하고 이에 대처하는 것은 우리의 국가발전을 위해 극히 중요한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장을 지니고 한국수출시장의 핵심이 되어온 미국은 경제대결의 시대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 변화는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부정적인 면을 특히 주목하고 대비해야 한다. 88서울올림픽에서 약간의 마찰로 표면화되기는 했지만,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최근까지 미국인들의 의식저변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왔는데,요즈음에는 여론지도층인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일반시민들사이에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동서대결의 시대가 막을 내림에 따라 시장경제 및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대표하던 한국의 상징적 의미가 갑자기 퇴색해 버렸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6ㆍ25사변의 잿더미위에서 불과 30여년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나아가서 미국식 정치경제제도의 승리라고 미국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은근히 내세우고 자부해 왔던 것이다. 사실상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은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지도력에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어왔다.
1960년대 이후 최근 2,3년전까지만 해도 쿠바,월남,이란,니카라과 등 세계 곳곳에서 미국식 정치경제제도는 도전과 비난을 함께 받아 왔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고도의 경제발전을 이룩해 왔고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치러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크게 과시했던 것이다. 동구공산권의 대변화도 한국의 발전에 영향을 입은 바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국제정세가 변화하자 한국을 내세워 시장경제의 우월성의 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둘째,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의 대변화에 따라 자유진영의 최일선국가로서의 한국이 지니는 전략상의 중요성이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
국방비를 줄여서 경제개발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과의 군비축소 회담을 계속하고 경제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소련이기 때문에 미국에 군사적 위협이 될 수 없다고 믿는 미국인들이 늘어나고,고르바초프등 소련내의 개혁파의 입장을 강화해 주기 위해서도 미국의 국방비를 대폭 삭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설득력있게 전개되고 있다.
소련과의 대결을 전제로한 안보문제의 중요성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무역적자가 오래 계속되자 미국시장에서 상당한 흑자를 내온 한국에 대한 경계심이 증가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경계심은 일본과의 무역마찰때문에 더욱 강화되고심화되었다.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한국을 일본과 동류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기업이 단결하여 여러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국내시장을 폐쇄하고 상대편시장에 침투하여 무역흑자를 내는 국가들의 표본이 일본이나 한국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대미흑자가 올해 들어 약간 줄어들고는 있으나 지난해까지 5백억달러 수준인데 비해서 한국의 것은 일본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도 올해는 적자가 될 가능성이 있고 기술수준이나 경제구조의 한일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아무리 설명해도 그대로 받아주는 미국인이 거의 없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는 절대로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되며,일본과의 접촉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한국과의 협상에서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경계심은 크게 누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대미 무역흑자에 의존하여 경제발전을 하던 시대가 급속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 경제대결과 블록화가 심화되면서 우리의 수출은 곳곳에서 더욱 높은 벽에 부닥칠 것이다.
미국의 변화에 대한 체계적 분석과 대책수립,새로운 시장개척과 대일무역적자해소,기술혁신과 노사화합을 통한 국제경쟁력의 제고등 해야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호화요트선 사기분양 사건이나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급증,총체적 위기국면을 선언해야 하는 정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은 정말 답답하다.
우리 모두가 지금 각성하더라도 때가 늦어진 것이 아닌지 두렵다.〈서울대 행정대학원교수ㆍ현 미 브루킹스연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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