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예고 왜 미국에 책임 떠넘기며 '핵 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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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핵(核)도박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북한의 3일 핵실험 관련 성명은 핵 카드를 국제사회에 분명히 보여주겠다는 평양 지도부의 예고다. 지난해 2월 10일 핵 보유 선언 이후 20개월 만에 핵실험은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국제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북한의 의도를 짚어본다.

(1) 이례적 예고 속셈은 국제사회 비난 차단 노려

북한이 핵문제와 관련한 중대조치를 사전 예고한 것은 드문일이다. 7월 5일 전격적인 대포동2호 미사일 시험발사로 국제사회를 놀라게했던 것과는 달라진 태도다. 북한은 핵실험이 지난해 2월 핵 보유 선언의 연장선상이란 점도 강조했다. "핵무기 보유 선포는 핵시험을 전제로 한 것"이란 설명에서 이런 뜻은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핵실험 강행 시 쏟아질 국제사회의 대북 비난을 차단하겠다는 의도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김영수 교수는 "핵실험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란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이를 통해 핵실험이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산물이란 점을 국제사회에 강조하려 했다는 것.

미사일 발사 강행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은 점도 사전예고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혈맹관계인 중국이 유엔안보리 대북결의안 1695호에 찬성표를 던진 뒤 북한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북한의 의도와 관계없이 핵실험 강행 시 북한은 미국.일본 등 국제사회뿐 아니라 한국 정부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입장에 처할 게 분명하다. 핵실험은 핵개발 프로그램의 완성을 국제사회에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2일 남북 군사 실무접촉을 북한이 제안한 것도 핵실험 이후를 염두에 둔 군부의 명분 쌓기일 것이란 얘기까지 나온다.

(2) 안전성 담보 가능? 피해 최소화 능력 없는 듯

북한 외무성은 핵실험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안전성이 철저히 담보된 핵시험을 하게 된다"고 밝혔다. 핵 전문가들은 방사능 낙진 등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하 핵실험을 시사한 것으로 분석한다. 그렇지만 '안전한 핵실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지하수 오염 등 또 다른 재앙이 불가피한 데다 북한이 이를 제어할 능력을 갖췄다고 보기도 어렵다.

북한의 핵 개발 수준과 핵실험 능력도 관심거리다. 핵실험 가능성에 반신반의하던 전문가들은 외무성 성명이 나오자 실험 강행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핵실험은 지난해 2월 핵 보유 선언 이후 예고된 시나리오"라며 "10일 노동당 창건일을 계기로 실험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핵실험을 할 경우 주변국이 지진파 등을 토대로 쉽게 상황을 포착한다. 이 때문에 100% 성공한다는 자신감이 없을 경우 결코 실행에 옮기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기동 국제문제조사연구소 남북관계연구센터장은 "국제사회의 압박을 견뎌낼 여력이 있느냐는 점도 중요한 고려 요소"라고 말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한다면 핵은 투명하게 만천하에 공개돼 대미 협상 카드로서의 의미를 크게 상실한다. 이 점도 북한이 '모험'을 주저하게 하는 고민거리일 것이란 진단이다.

(3) 미국 압살책동 때문? 김정일 돈줄 봉쇄에 극단 선택

북한의 핵실험 강행 선언은 미국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마카오 은행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동결을 시작으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 압박은 거세졌다. 북한은 1년 넘게 워싱턴을 항해 대북 제재 완화와 북.미 양자대화를 촉구했지만 미국은 묵묵부답이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우리를 고립.질식시켜 사회주의 제도를 허물어 보려는 망상 밑에 온갖 비열한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는 성명 내용에서는 절박감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북한이 부시 행정부 훨씬 이전부터 핵 개발을 추진해 왔고,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핵 합의 이후에도 약속을 어기고 핵 개발을 추진해 왔다는 점에서 '미국의 압박 때문'이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북한 지도부가 핵 카드를 북한 체제의 내부 불만 해소에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잇따른 계좌 동결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설 명절에 이어 추석 때도 주민에 대한 특별배급을 하지 못했다. 수해에 따른 엄청난 인명피해 발생으로 민심도 흉흉한 실정이다.

전현준(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북한연구학회장은 "북한이 핵실험을 해도 미 행정부를 움직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은 이미 북한이 핵무기 1~2기를 가졌다고 보고 있고, 추가 개발.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4) 왜 추석 앞둔 시점에? 한·일 정상회담 등 치밀한 계산

북한 성명은 3일 오후 6시 중앙통신과 조선중앙TV.평양방송 등 북한 관영 매체를 통해 일제히 쏟아졌다. 개천절 휴일을 즐기던 청와대와 통일부.외교부.국방부.국가정보원 등 관련 부처의 장.차관급 고위 공직자와 실무자들은 비상소집됐다. 사실상 추석 연휴가 시작된 상황에서 떨어진 북핵 날벼락이었다.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추석 당일만 쉬는 북한이 우리가 제대로 쉬는 걸 눈 뜨고 보기 싫은 모양"이라는 볼멘소리가 이어졌다. 지난해 북핵 6자회담 합의 결과를 담은 9.19 공동성명도 추석 연휴 마지막날 나왔다. 또 핵 보유 선언을 한 것은 지난해 2월 10일 설 연휴 마지막날이었다.

정부 당국은 북한이 성명 발표 시점을 치밀하게 계산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금융 제재가 강화되고, 일본도 아베 총리 등장 이후 대북 압박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핵실험 카드로 맞대응하려 했다는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9월 15일) 결과가 나오고, 한.일, 중.일 정상 간의 회담을 앞둔 시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양무진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는 "11월 7일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도 감안해 6자회담 복귀에 대한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압박 정책이 역효과를 냈다는 메시지를 보내 대북정책의 기조를 바꾸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서는 반기문 외교부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진출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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