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 중남미 영광과 좌절|인민 해방과 거리 먼 부자비한 폭력|민중 울리는 게릴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빛나는 길로).
페루 남부 고원지대의 농촌을 중심으로 인민해방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택동주의 게릴라 단체 이름이다.
다소 전의를 북돋우려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도 하지만 무장게릴라단체 이름치고는 꽤 부드러운 편이다.
페루를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만 중요 요인의 하나인 10년 내전을 이끌어오고 있는 센데로 루미노소의 무장병력은 현재 3건5백∼5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도자는 아야쿠초대 경제학 교수였고 65년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아비마엘 구스만(일명 곤잘레스).
이들 게릴라들은 잉카어의 일종인 퀘추아어를 쓰고있으며 페루 남부 안데스산록의 농촌지역 상당부분을 장악,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센데로는 수도리마를 포함한 전국적인 지하 접선망을 갖고 대학·노조·은행·군속·공무원조직에까지 파고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들판의 소도 살륙>
지도자 구스만의 소재는 현재까지 정부군은 물론 어느 누구에게도 정확히 알려진 일이 없다.
모택동 게릴라전법을 따라 농민 속에 묻혀 살면서 인민의 해방을 외치고 있는 센데로가 지난 80년 무장 봉기한 이래 전개해 온 「활동」을 보면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는 대목들이 적지 않다.
우선 지난 10년 동안 파괴한 송전탑이 1천1백개나 되는데 가격으로 환산하면 1백2O억달러에 달한다는 게 페루당국의 집계다.
이는 페루 외채총액(1백99억 달러)의 5분의3에 해당하는 엄청난 국민재산의 손실이며, 인민을 해방시키는 투쟁이기보다는 전기가 안 들어와 칠흑의 밤을 보내야하는 수많은 「민중의 괴로움」을 야기했다.
민중을 괴롭히는 게릴라. 게릴라투쟁에는 대체로 적지 않은 「민생의 희생」이 뒤따르게 마련이긴 하지만 조용히 풀을 뜯고 있는 들판의 평화로운 소들을 마구 죽여버리는 센데로의 무모한 폭력에 이르러서는 제도화된 라틴 아메리카 우익 암살단들의 잔인한 야만성에서 느꼈던 분노같은 것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지주의 목장에 있는 소도 아니고 농민들이 몇 마리씩 생계수단으로 애지중지하며 기르는 소들을 왜 무참히 살육하는지….
아무래도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설령 소들이 도살돼 부르좌들의 배를 더욱 살찌게 하는 게 못 마땅해도 소를 파는「농민의 수입」이 있고 하다 못해 소 내장이나 기름덩이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기층민중의 절박한 「생존」이 해방에 앞선 굶주림을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농촌 게릴라인 센데로와는 달리 수도 리마시를 중심으로 테러를 벌이고있는 도시게릴라 투파크 아마루 혁명운동(Movimiento Revolutinario Tupac Amaru).
이 게릴라들의 무자비한 테러와 살육은 하나의 조직화된 좌익폭력이 빚어내고 있는 참상을 갈 드러내 보여준다.
MRTA가 휘두르고있는 폭력이 비록 양적인 면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우익 폭력암살단들의 살해나 테러에 비해 훨씬 못 미치지만 그 잔인성에서는 별로 다를 게 없다.
잉카왕족의 한사람으로 최초의 스페인정복에 대항해 싸운 게릴라 지도자였던 투파크 아마루라는 사람의 이름을 뒤에 붙이고있는 이 게릴라단체는 요원들이 주로 대학생 또는 대학출신의 지식인들인 것으로 알러져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모였다는 MRTA의 암살 사례와 폭력을 보면 센데로보다 훨씬 포악하다.
지난해 1월 중순 이 도시게릴라들은 페루 전국방장관 로페즈 알부하루씨를 리마시내 한복판의 백화점 앞에서 기관총을 난사, 즉사시켰다. 3명의 게릴라들이 쏴댄 총탄세례를 받은 알부하루씨의 시체는 벌집을 연상케 했다고 한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팬 아메리카노TV사 사장의 승용차에 수십 발의 기관총을 난사, 운전수를 즉사시키고 벤츠방탄차였기 때문에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장을 납치했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지난 한해만도 게릴라와 정부군의 좌·우 폭력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페루국민의 수가 3천2백 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특히 MRTA는 콜롬비아의 도시게릴라 M19과도 연대하면서 마약조직과 깊숙이 연결돼 있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87년에는 주페루 한국대사관 현지인 운전기사 한 명이 MRTA 게릴라들에게 피살된 일도 있다.
대사관 심부름을 나가 볼일을 보던 중 외교관 번호판 차를 노리는 게릴라들이 달려들어 차를 탈취하러 하자 뺏기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백주 대로변에서 사살당하고 말았다.
현재 MRTA 게릴라들은 체포돼 투옥중인 지도자 폴리의 석방과 맞바꿀만한 거물을 납치하려고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이다.

<잔인성 차이 없어>
좌익과 우익의 무자비한 폭력이 아직도 계속되면서 순박한 농민들의 목숨을 무참히 앗아가고 있는 중남미대륙.
극우세력(정부군)과 극좌세력 (게릴라)의 총에 맞아 억울하게 죽어가는 농민의 희생 비율은 15대1이라고 한다.
현재 게릴라활동이 가장 치열한 나라는 페루와 콜롬비아.
페루가 현재 극도의 사회혼란과 경제파탄 속에서 기우뚱거리고 있는 것도 10년 동안 계속돼온 내전상태의 게릴라전이 중요 요인의 하나다.
50년대부터 시작된 콜롬비아 게릴라활동은 마약조직과 깊이 연루돼있으면서 중앙정부에는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한 채 소집단으로 나뉘어 주로 극적인 테러를 자행하는 게 그 특징이다.
이밖에 볼리비아·베네수엘라· 과테말라·온두라스 등에도 게릴라들이 있으나 농민반란을 통한 혁명을 성공시킬 가능성은 현재론 거의 전무하다는 게 현지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미국무부와 국방부 자문기관인 랜드연구소 보고서 등에 따르면 중남미 농촌지역 게릴라전은 대부분의 경우 농부들이 정부군과 게릴라 양측에 대해 아주 중립적이고「다만 홀로있게 내버려두기만」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농민들이 게릴라에 동조, 79년 산디니스타혁명을 성공시킨 예외적인 니카라과의 경우도 게릴라들이 「테러」를 통해 점령한 것이 아니라 정부군의 반복적인 무고한 「학살」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랜드연구소 보고서는 『중남미에서 게릴라들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대부분의 게릴라지도자들이 직접적인 정치적 결과는 낳지 못하는 채 세계 언론의 훌륭한 기사거리만 제공하는 극적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이상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농민 지지 못 얻어>
베네수엘라의 게릴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의심 많고 보수적인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해 패배했다』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인정했다.
보고서는 이어 미국의 대중남미 게릴라정책을 다음과 같이 신랄히 비판했다.
『미국은 아직도 탄압이야말로 무감각한 농민들을 정치적 과격파로 바꾸어 놓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중남미 군부의 반게릴라 전술 및 민간활동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미국의 정책들은 역설적이게도 권위주의적 체제를 고무했고 그러한 체제를 이끄는 군부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정부군이 원하는 정보를 제공치 않으면 자동적으로 게릴라협력자로 몰리고 마는 안데스산록의 농민들 1백명 중 99명은 실제로는 게릴라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안데스산맥의 순박한 볼리비아 인디언들조차도 낮선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활이야기나 가족의 동정을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좌, 우의 폭력이 대결하면서 빚어낸 기막힌 중남미의 인간 비극은 니카라과의 78년9월 소모사 사임요구 봉기소탕작전 때 국민방위군이 마타갈파시에서 무고한 주민4명을 살해하면서 대검으로 여자 시신의 배를 가르고 남자는 고환을 떼다 입에 물러 놓는데서 전형적인 잔혹성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옆집 쓰레기더미 속에 숨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한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이 같은 잔혹상은 7O년대 중반부터 준군사·준경찰암살단을 조직, 전국규모로 확대시키면서 제도화시킨 중남미 우익 폭력과 들판의 소들을 마구 살해하는 좌익게릴라들의 무모한 폭력이 뒤덮고 있는 암울한 「중남미 상황」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글 이은윤특집부장 문일현 기자
사진 최재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