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세희의 남자읽기] 또 바람 피웠지? 또 그 소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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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영향력 있는 거래처 사람의 술접대를 했던 S씨(42). 오늘도 예외 없이 "어떤 여자랑 놀았느냐"고 닦달하는 아내의 등쌀에 시달리다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간신히 출근했다. S씨는 상장회사 영업부장으로 회사에선 선.후배, 동료 사이에서 인기도 꽤 좋다. 훤칠한 외모에 성격 좋고 유머감각까지 갖춘 덕분이다.

하지만 집에만 가면 수시로 아내로부터 파렴치한으로 몰린다. S씨가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8년 전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 탓이다. 아내와는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알게 돼 2년여의 열정적인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했다.

결혼 후 몇 년의 세월이 지나 아내에 대한 열정이 '정(情)'으로 대체되면서 단조로운 결혼생활에 약간의 권태를 느끼던 즈음, 접대가 주된 업무인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몇 달 가지 않아 사내에서 탁월한 술상무로 자리를 굳혔던 S씨. 어느 날 수시로 드나들던 술집 여성과 그만 외도를 해버린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바람기는 얼마 안가 아내의 의심을 받게 됐고 와이셔츠에 밴 화장품과 향수냄새를 근거로 닦달하는 아내에게 S씨는 모든 것을 자백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아내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당장 헤어지자고 요구했다. 참담한 죄책감에 싸였던 S씨는 "이번 일만 용서해 주면 다시는 다른 여자 곁눈질 안 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한 끝에 간신히 파경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는 게 S씨의 설명이다. 그 사건 이후로 술 마신 날은 여지없이 아내의 비난과 저주를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한동안은 지은 죄(?)가 있어 억울한 소리도 묵묵히 들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아내의 행동에 그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부부 사이는 점차 멀어졌다.

S씨의 처지는 그간 업무의 연장으로, 때론 업무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나라 접대문화가 빚어낸 산물이다. 통상 중요한 접대엔 술과 함께 '접대부'가 나오게 마련이다.

사람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해방감을 만끽하게 하는 술과 젊은 여성이 함께 하는 상황에 반복 노출되는 남성 중엔 자칫 S씨처럼 실수를 저지르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S씨 역시 자신이 맨정신으로 바람을 피우진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미 잘못을 저지른 남편, 세월이 흘러도 용서가 안 되는 아내. 앞으로 함께 해야 할 세월은 많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S씨는 자신이 아내에게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를 빌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만일 그랬는데도 끊임없이 비난을 받았다면 아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아내와 둘만의 대화가 힘들 땐 전문 상담가의 도움을 청해서라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해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서로 미워하고 지겨워하면서 지낼 것인지, 아니면 이제라도 서로 용서하고 아끼며 살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무심한 남처럼 지낼 것인지 등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해 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평생의 주홍글씨로 여기고 비난하는 배우자와 남은 수십년간의 인생을 불행하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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