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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장 발언과 포퓰리즘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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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용훈 대법원장은 말을 참 잘한다. 해박한 법 지식을 바탕으로 쏟아내는 그의 다변(多辯)은 듣는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지난번 지방법원을 잇따라 찾아 "검찰 수사 기록을 던져 버려라" "변호사들이 작성한 서류는 상대방을 속이려는 것이다"며 검찰과 변호사를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할 때의 분위기는 마치 '부흥회'를 방불케 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다. 검찰과 변호사계가 자신의 발언 때문에 들끓을 때 이 대법원장은 서울고.지법을 방문해 해명성 발언을 하면서도 50여 분간 원고도 없이 했다. 법원 일각에서는 이 대법원장의 솔직하고 화끈한 언행에 대해 '권위의 파괴'라며 반기고 있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궁상맞게 혼자 점심이나 먹고, 각종 현안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던 과거 권위주의적 대법원장의 모습에서 탈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재판은 국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는 이 대법원장의 소신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법원장의 이번 발언이 상당 부분 공감을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검찰에서 소환 조사를 받은 뒤 "앞으로는 서초동을 향해서는 용변도 안 보겠다"는 말이 나오고, 변호사를 향해 "법률 장사꾼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나오는 현실을 감안할 때 '법조 3륜(輪)'의 폐해를 지적하는 그의 말은 국민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 효과가 있었다. 검찰과 변호사계가 자신들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눈초리를 한번 돌아볼 수 있게 해 준 셈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대법원장의 명쾌하고 분명한 각종 발언은 전형적인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에 근거한 것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 대법원장도 이를 크게 의식한 듯하다. 그는 "나는 포퓰리즘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슴이 확 막힌다"고 말했다. "이번 발언으로 최고로 피해를 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며 섭섭한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성경과 기도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와 재판의 근본은 성의를 갖고 하는 데 있다"는 뜻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구절인 '청송지본 재어성의(聽訟之本 在於誠意)'를 인용하며 답답한 속내를 드러냈다고 한다. "나는 재판을 내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포퓰리즘이란 지적에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법원을 위해 크게 한 건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략에선 성공했지만 전술에선 실패했다"는 이 대법원장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검찰에 사과성 발언을 하면서도 검찰이 증거분리제출 제도를 전국적으로 실시키로 한 것을 겨냥해 "역시 검찰이 우리보다 한 수 위다"라는 말은 사법계 수장으로서의 권위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이념적으로는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지만 언행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적 행태"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오히려 법원은 물론 법조계 전체에 대한 신뢰를 깎아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장은 사법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중함과 무게가 실려야 한다. 수도승처럼 입을 꼭 다물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법원장의 직설적 화법에 당혹스러워 하는 국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1년 전 대법원장으로 취임할 때 '코드 인사' 논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국민은 그의 다변이 현 정부의 행태와 비슷해지는 것 같아 발언의 진정성 여부와 상관없이 피로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마침 이 대법원장이 10일 관훈클럽 토론회에 나와 사법제도 개혁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옳고 그름을 말로써 따지지 말라"는 선사(禪師)의 가르침이 새삼스럽다.

박재현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