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두우칼럼

가마솥 안의 물고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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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열심히 일하다가 생긴 잘못을 지나치게 질책하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부지런을 떨다가 다치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일이나 하는 게 낫다는 무사안일 풍조가 판치게 된다. 작은 실수라 해도 반드시 질책해야 하는 것도 있다. 그냥 방치하다 보면 조직의 문화로 굳어져 마침내 큰일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다.

무신경이 낳은 '차 선물' 소동

최근 청와대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9월 22일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이 각계각층 인사 5000명에게 우리 차와 다기세트를 추석 선물로 보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차 생산 농가들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전국 9곳의 특산차를 골고루 담았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전직 대통령과 장.차관, 국회의원 등 사회지도층 인사와 집중호우 피해자, 소년.소녀 가장 등이 대상이었다. 그 직후 인터넷에서 야단이 났다. "아직 컨테이너에서 살고 있는 수재민과 살림이 어려운 소년.소녀 가장에게 무슨 차 선물이냐"는 것이었다. 생뚱맞다는 얘기였다. '생뚱맞다'는 것은 행동이나 말이 상황에 맞지 않고 매우 엉뚱하다는 뜻이다. 이틀 뒤 청와대는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쌀 등을 추가로 보내기로 했다"고 발표해야 했다.

대통령 추석 선물의 업무를 관장한 총무비서관실은 물론 청와대의 어느 누구도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청와대는 "선물 품목을 결정한 곳과 대상자를 선정한 곳이 달라서 발생한 해프닝"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단순 실수라고 넘기기에는 영 뒷맛이 개운치 않다. "명절 때마다 해왔던 일이니 별 문제 있겠느냐"는 무신경과 게으름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안보 관련 사안이나 경제정책, 국가의 중요 인사사항조차 이처럼 제대로 점검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는 것 아닐까 하는 불신과 불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청와대와 여당이 과연 뭐라 했을까. "'잘나가는 20%'만 염두에 있고 '희망 없는 80%'의 서민에 대해서는 동냥 주듯 하는 거냐" "부자당.강남당의 본색이 드러났다"고 비아냥대지 않았을까. 시중의 보통 사람도 선물을 할 때는 받는 대상을 고려한다. 하물며 대통령의 선물을 대상을 가리지 않고 보내는 지금의 청와대는 결코 정상이 아니다.

청와대에 비상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2003년 5월 미국을 방문한 노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상황실로 전화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을 때부터 그랬다.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들이 가족들과 함께 소방헬기를 타고 유람성 시찰을 하고, 대통령 부속실장은 지방에 내려가 형사사건 피의자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 한 청와대 행정관은 한.미 간 전략적 유연성 협상 내용을 담은 비밀문건을 정치인에게 통째로 넘겨줬다.

문제가 발생해도 그때뿐 '동지'니 '친구'니 하면서 곧 다른 자리에 슬그머니 복귀시키곤 하는 패거리 온정주의에 국민은 질렸다. 인사 청탁하면 패가망신시키겠다던 철석같은 약속은 간 곳 없고, 인사 청탁 의혹에 대해 '광의의 업무협조'라고 둘러대는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의 모습에 억장이 무너졌다. "경제는 좋은데 민생이 어렵다"는 생뚱맞은 소리에 국민은 기대를 접었다. "우리는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국민이 몰라준다"고 원망하는 청와대에 대해 국민의 67%는 "현 정권은 잘한 게 아무것도 없다(중앙일보 9월 22일자 1면)"고 최종 결산서를 보냈다. 찾아 보면 잘한 게 왜 없겠는가.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겠다는 적극적 반대자가 이만큼 됐다.

물이 끓는 줄 물고기만 몰라

한 여당 의원은 자신들의 신세를 '부중어(釜中魚.가마솥 안의 물고기)'로 표현했다. 국민이 불을 지펴 물이 데워지고 있는데도 정작 솥 안에 있는 물고기는 살이 익는 줄도 모른다는 개탄이었다. "부패해도 유능한 정권이 낫다"는 국민이 늘었다고 한다. 이런 말까지 나오게 된 데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할지는 분명하다. 국가의 주요 직책을 맡은 이들이 자리 값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과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김두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