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6)늘푸른 소나무-제3부 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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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김원일 최연석 화
그로부터 닷새 뒤 아침, 석주율만이 감방에서 불려나가 이발과 목욕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자들은 모두 장기 외역반으로 뽑힌 마흔 명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떠날 때를 앞두고 이렇게 때빼고 광내게 되었다면 낄낄거렸다.
『오후에는 면회도 있을 걸. 면회대장에 오른 가족에게 통기를 했다나 봐. 여지껏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자야 물론 감방에 죽치고 있어야겠지만.』
이발소 앞에 줄을 서 있던 한 수인이 아는 체 말했다.
『아직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요?』
다른 수인이 물었으나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구레나룻 자극이 시커먼 서른 중반의 사내가 걸찍한 목소리로 한마디했다.
『어쩌면 바다 건너 저 화태라는 곳으로 가게 될는지도 모르오.』
『화태가 어딘데요?』
『일본 본토 위쪽이 북해도 땅이고, 그 위가 화태라는 땅이오. 아주 추운 지방이랍디다. 러시아와 전쟁으로 양도받은 땅인데, 극소에 나무가 무진장이고 광물이 많이 나서 벎고과 탄광에 사람들이 동원된다는 말을 들었소.』
그 말에 모두들 귀가 솔깃하여 한마디씩 물었다.
『배를 타고 가면 몇 시간이나 걸려요?』
『몇 시간이 뭐요. 밤낮으로 며칠은 간다던데.』
『만주 땅만큼 춥소?』
『모르긴 해도 만주보다 춥고 조선 땅 겨울의 몇 배는 더 춥답니다.』
『그러면 고향에는 아주 못 돌어오는 게 아니오?』
『그건 알 수 없지요.』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모두 울가망한 표정으로 화태라는 낯선 땅을 머리 속에 그렸다. 만주보다 더 추운 땅, 그 곳에서 나무를 베거나 곡팽이질을 한다. 잘 입지도 잘 먹지도 못하고 짐승처럼 그런 노역을 한다면 겨울은 닥치는데, 봄까지라도 배겨낼까. 그 땅에서 죽는다면 진짜 무주고혼(무주고혼) 신세가 아닌가. 그들은 그런 불길한 예감을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설마 우리를 그런 데로야 보내겠어. 우리보다 먼저 외역 나간 팔팔한 친구를 보내고 다음 차례라면 우릴 테지. 우린 다 비실비실하는 치들 아냐. 멀쩡하다지만 병자두 있구.』
멀대 키의 사내 말에 모두 엔간히 위안이 되는지 구겨진 상판이 펴졌다. 감옥소란 풍문에 의지하다 보니 이 말을 하면 이 말에 솔깃했다, 저 말을 하면 저 말에 솔깃해지는데는 바깥 세상보다 귀가 더 엷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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