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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상처」치유 어디까지 왔나|「5·18」 10주기 맞아 되돌아 본 우여곡절과 미해결의 장|「폭도난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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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80년5월 피로 얼룩졌던 「광주의 봄」은 10년이 지난 오늘 푸른 생기를 되찾았다.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됐던 그 날의 함성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기까지 8년, 그리고도2년의 세월이 또다시 흘렀지만 처절했던 「광주의 5월」은 치유되지 않은 채 아직도 빛고을사람들에게는 한과 원의 휴화산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고통과 우여곡절의 10년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그 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어떠했으며 그 결과 무엇을 이루었고 아직도 남아 있는 미해결의 장은 무엇인가. 광주민주화운동 10주기를 맞아 특집으로 알아본다. 〈광주〓임광희기자〉

<진상규명>
광주항쟁은 5공정권에 의해 폭도들로 인한 난동, 즉 「광주사태」로 왜곡돼오다 88년 민주화합추진위(민화위)를 거쳐 6공들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 성격이 규정된 후 국회 청문회까지 열렸으나 진상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묻힌 채 10주년을 맞았다.
국회 광주청문회가 전 국민의 열화 같은 관심 속에 열리고 광주특위가 앞강서 현지조사까지 벌어지는 등 한동안 진상규명을 위한 진일보한 노력이 전개됐으나 결국은 정호용 전의원의 이른바 양시론 파문만 남긴 채 주춤해졌다.
정치권은 광주 현지여론과는 별 상관 없이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또는 보상으로 광주문제를 매듭지으려 시도했으나 그나마 민자당 출범 등으로 벽에 부닥쳐있는 형편이다.
광주항쟁관련 직접 피해자와 시민들은 광주문제해결의 열쇠는 정확한 원인 등 숨김없는 진상규명이 선결돼야 한다고 주장, 당시 군 투입과 발포 등의 진상을 가러 그 책임자를 법에 의해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윤강옥 5·18광주민중항쟁 동지회장(38)은 『광주문제는 정확하게 진상이 규명된 후 그에 따라 책임자처벌과 명예회복·배상이 이루어져야 해결된다』고 밝히고 『지난 10년 세월 억압받는 상황에서도 버텨 왔으므로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윤회장은 『이것이 광주시민 뿐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서 바람직한 해결책』이라며 무엇보다 진상규명이 선행돼야한다고 주장했다.

<희생자수>
80년5월17일 전국일원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함께 광주에 공수부대 등 계엄군이 투입된 후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까지 11일 동안 광주에서는 과연 어떤 참극이 벌어졌으며 희생자는 몇 명에 이르고있을까.
정부의 공식통계는 1백95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같은 공식통계 희생자에는 군인 23명과 경찰 4명, 존속살해 3명 등을 포함하고있어 순수한 시민 희생자는 1백65명인 셈이다. 정부가 공식 인정하고 있는 민간인 희생자는 80년 1백61명에서 85년 2명이 추가됐으며 88년 다시 2명이 늘어났다.
또 민간인 부상자는 1천4백59명, 행방불명 32명으로 정부는 광주항쟁 피해 민간인으로 사망·부상·행불을 합쳐 모두 1천6백56명을 인정하고 있다.
광주시민들은 누구 하나 이 같은 정부의 공식 피해자수통계, 특히 사망자수를 믿으려하지 않고 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88년5월 벌인 「광주시민사회의식조사」에선 3백73명의 응답자중 32. 7%인 1백22명이 사망자는 2천명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의 통계가 적어도 광주에서만은 불신 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광주항쟁 관련단체회원과 대학생들은 정부의 통계숫자는 축소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 광주의 참상을 은폐하려 한다고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광주시민 대다수가 정부의 공식통계를 믿지 않고 사망자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쟁 당시와 그 후 계속 나돈 대량학살 유언비어의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88년5월18일부터 6월30일까지 희생자 추가 신고기간 중 광주시와 전남도에 접수된 행방불명자가 1백2명이나 되고 이중 32명이 항쟁기간에 증발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지난해 1월16일 국회 광주특위 현장검증소위의 현지조사 중 광주시 월남동 녹동마을 앞 부엉산에서 인근 주민들의 증언으로 항쟁 희생자로 추정되는 암매장 사체1구가 발굴되는 등 그럴듯한 암매장설 등이 아직도 나돌아 불신의 늪은 깊어만 가고 있다.
전계량 5·18광주민중항쟁유족회장(56)은 『정부의 사망자 통계를 믿지 않는다. 확실한 증거를 댈 수 없어 답답하지만 사망자는 정부 통계숫자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명예획복>
광주항쟁이 「폭도」들에 의한 사태에서「민주화 운동」으로 재조명됐지만 5공세력에 의해 폭도로 매도된 시민, 특히 항쟁관련 직접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은 이뤄지지 않고 특별법 제정과 함께 유보된 채 항쟁 10주기를 맞게 됐다.
광주시민들은 5공 정권이 5·18을 폭동으로 매도, 시민들의 명예를 훼손시킨 만큼 정부가 특별법제정에 앞서 사과담화문을 발표, 시민전체에 대한명예회복조치를 하루속히 취해야 한다고 바라고 있다. 특히 광주항쟁과 관련, 당시 군사재판에서 억울한 형을 받은 시민만해도 3백명에서 5백명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들의 명예회복문제조차도 아직 본격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있어 큰 반발을 사고있는 실정이다.
항쟁과 관련, 억울한 형을 받은 홍남순 변호사(78)는 『광주문제는 숨김없는 진상규명 및 배상, 기념사업과 함께 5·18직후 계엄군법회의에서 내란음모죄 등의 누명을 쓰고 죄인 아닌 죄인으로 핍박받아온 피해자들에 대한명예회복도 이뤄져야 비로소 해결된다』면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된 이상 민주화에 앞강선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단죄한 군사재판은 당연히 전면파기 또는 무효화돼야 옳다』고 했다.
생활안정자금 5백만-3천만원 우선 지급

<피해자대책>
정부는 88년4월1일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국민대화합차원의 치유대책을 발표, 항쟁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천명했으나 그 후 생활안정자금 명목으로 최고 3천만원까지의 돈을 지급한 외에 근원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80년 항쟁후 사망자 1백13명과 부상자 1백22명에게 2백만원에서 4백만원씩을 지원한 데 이어 2차로 지난1일부터 광주시의 기채형식을 통해 공식 인정된 항쟁피해자중 검진에 불응하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3백54명을 제외한 1천3백2명을 대상으로 사망자와 행불자·중상자는1인당 3천만원, 일반부상자 1천만원, 경상자는 5백만원씩의 생활안정자금을 지급하고있다.
또 전남지역개발협의회에서도 83년부터 85년 사이 사망자와 부상자 모두 3백5명에게 2백만원부터 1천만원씩을 지원했다.
그러나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지원은 광주관련 피해당사자들을 포함한 시민들의 『 배상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여당의 『보상』이라는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가운데 광주문제를 몇 푼의 돈으로 희석시키려 한다는 비난과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등 부작용만 낳은 채 피해자대책 차원에서도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정부의 치유대책이 발표뿐 근원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있는 가운데 사망자유족과 부상자 등은 대부분 생활고에 부상후유증·정신적 고통 등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김영철씨(43, 5·18당시 수습대책위 기획실장)등 중상자 5명은 아직도 정신병원 신세를 지고있으며 날마다 계속되는 극심한 통증을 10년째 진통제로 겨우 달래는 피해자도 수두룩한 실정이다.
이추자 5·18 광주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간사(35·여)는 『진통제 등 특수약품조차 구하기 어려워 부상당시보다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중상자가 많다』면서 『부상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대책이 신속히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화항쟁 10돌을 맞은 광주는 삐거덕거리는 정치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곳저곳이 심각한 5·18증후군으로 시달리고 있다.
전남을 포함한 광주권의 학원가 시위는 지난 한햇 동안만 해도 하루 두 차례 꼴이 넘는 8백49회나 발생, 경찰관 1천6백98명이 다치고 시민·학생 등의 피해는 아예 파악조차 되지 않는 시위악순환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광주미문화원이 지난해 5월10일 폐쇄되기까지 했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시위진압을 위해 난사된 최루탄으로 부상한 사람이3백84명에 달해 「광주민주화부상자협의회」라는 또 하나의 부상자단체가 만들어지기까지 한 광주의 5월.
송기숙 전남대교수(55·국문학)는 『광주시민들이 정치권의 해결을 기다리며 10년을 지내는 동안 이젠 지칠 대로 지쳐 불만이 팽배해진 느낌』이라며 『정치권이 해결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이제 자칫 민중운동차원의 과제로 떠넘겨지는 인상까지 든다』고 시급한 해결책을 아쉬워했다.

<기념사업>
광주 시민들이 항쟁의 얼을 기리고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5·18 치유차원에서 정부에 요구하거나 자체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은 희생자묘역 성역화와 기념관 및 위령탑 건립 등. 광주시 망월동 시립공원 묘원 제3묘역(면적9백50평)에 묻혀 있는 항쟁 희생자는 전영진군(당시 광주대동고 3년) 등 모두 1백22기에 이른다.
또 이 묘역에는 88년6월 항쟁의 뇌관 구실을 한 연세대 이한열군 등 광주항쟁과 직접관련이 없는 이른바 민주화투쟁 열사 23기도 함께 묻혀있다.
망월동 묘역은 광주항쟁이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빛을 보면서 국내는 물론 외국에까지 민주화 성지로 널리 알려져 국내외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등 명소로 변했으나 광주 도심에서 12km나 떨어진 외진 곳인데다 묘역도 비좁아 성역화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등이 중심이 돼 추진하고있는 이 사업은 희생자 묘역을 현 상무대부지로 옮겨 기념관 건립과 함께 성역화한다는 것.
광주시민들도 5·18과 관련된 시민집단배상차원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된 상무대부지(면적 67만5천평) 전체를 광주시에 무상 양여, 이곳에 5·18공원을 조성하고 기념관과 희생자 묘원을 세울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노태우대통령과 김대중 평민당총재간의 청와대 영수회담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상무대부지의 공원화는 국방부의 무상 양여 난색표명으로 사실상 수포로 돌아가 5·18희생자 묘역 성역화도 시민들의 희망사항 선에 머물고 있다.
광주항쟁 희생자 위령탑 건립사업은 85년5월16일「5월 광주민중혁명 희생자위령탐 건립 및 기념사업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가 발족, 본격적인 추진에 나섰으나 10억원기금 목표 중 그동안 해외동포성금 3천만원과 국내성금 2천5백여만원 등 5천5백여만원의 기금밖에 조성하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다.
채정섭 5·18기념사업회 간사(27)는 『당초 위령탑을 항쟁10주기에 맞춰 건립할 계획이었으나 항쟁의 진상규명 등 선행조건들이 미결로 남는 등 시기적으로 이른 감도 있고 기금조성도 여의치 않아 건립계획을 늦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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