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칼럼

과욕이 빚은 오보 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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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문을 보고 놀란 국내 방송사 특파원들의 반응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일본의 충격적인 정치 실험 소식은 순식간에 각 방송 아침 뉴스 시간의 주요 뉴스가 됐다. 불행히도 그날은 4월 1일이었다. 만우절을 맞아 아사히가 웃자고 해본 '장난'에 속아 웃지 못할 오보를 내고 말았으니 지금도 방송계에 회자되는 '만우절 오보 소동'이다.

만우절도 아닌 지난 월요일, 한국 조간신문들에는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평양의 공관장 회의에서 했다는 연설 내용이 '북한 핵무기 5~6개 보유'라는 제목을 달고 일제히 보도됐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인 로버트 칼린이 강석주의 입장에서 써본 가상의 연설문을 진짜라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 희대의 오보였다.

다음날 아침, 신문들은 보도 경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일제히 사과문을 실었다. 마감에 쫓기는 '마(魔)의 시간대'인 오후 11시17분에 연합뉴스에서 1보가 들어왔기 때문에 '팩트(fact)'를 확인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고, 필자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는 해명이었다.

마감시간 때문에 팩트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은 기자들끼리 통하는 변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독자에 대한 해명은 될 수 없다.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팩트지, 마감시간은 관심 밖이다. 확인이 안 되면 안 쓰면 그만이다. 더구나 칼린이 쓴 글은 지난주 목요일부터 '노틸러스'라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떠 있었다. 노틸러스는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진 기자라면 자주 들어가 보는 사이트다. 그런데도 시간이 없어 확인을 못했다는 것은 부족한 프로페셔널리즘을 자인하는 꼴밖에 안 된다.

신문들이 무리를 해가며 칼린의 글을 기사화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강석주가 했다는 연설의 내용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흥미진진해서 기사화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대답일 것이다. 우리가 안 써도 다른 데선 틀림없이 쓸 것이라는 경계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내용만 재미있으면 사실 확인은 다음 문제라는 센세이셔널리즘, 눈 뜨고 당하느니 일단 쓰고 보는 게 안전하다는 보신주의 탓이 컸다는 얘기다.

외무성 관리가 군부와의 갈등을 공개적으로 표명할 수 있는 것인지, 그걸 외부에 유출하는 게 과연 가능한지 등 북한 체제의 특수성과 관련한 기본적 의문은 과욕에 묻혀 버렸다. 칼린의 글 곳곳에 '작문'임을 암시하는 코드가 배치돼 있었지만 그걸 헤아릴 여유도 없었다. 누가 그 상황에 있었어도 '확인 불가'를 이유로 눈 딱 감고 무시하기는 사실 어려웠을 것이다. 그게 아직 우리 언론의 수준이다.

아사히의 만우절 기사 끝에는 '오늘은 4월 1일'이라는 한 줄이 달려 있었다. 1면에는 '오늘 지면에 가공의 기사가 하나 있다'는 친절한 안내까지 있었다. 팩트 확인에 철저하지 못한 관행이 만우절 오보 소동을 낳았고, 이번에는 강석주 연설 오보 참사를 빚었다.

팩트 확인을 소홀히 함으로써 언론 스스로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은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문은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다.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은 공론(空論)이고, 공론이 판치는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팩트의 확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언론의 기본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이번 오보 파문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신문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뼈를 깎는 자성을 다짐해 본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