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 소나무(950)-제2부 세속 타락(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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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여지껏 참아왔지만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장경부가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문을 떼었다. 『지난 양력 삼월 초하룻날 경성에서 처음 시작된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문 낭독 식장에서 처음 사직된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문 낭독 식장에 나 역시 참석했고, 그날은 물론 그 이튿날의 장안을 온통 뒤흔든 독립만세 시위에 상충 형님과 함께 남 앞장에 나서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상충형님에게, 우리도 어서 고향으로 내려가서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주장한게 저였습니다. 또한 고향으로 내려와서 그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동분서주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병영장 만세 운동 때 못나갔겠습니까. 진정 감옥살이가 두려워 그랬다면, 이 자리에서 할복자살이라도 하겠습니다!』
장경부의 말에 모두 숙연해졌고, 아녀자 하나가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어 흐르는 코피를 닦게 하였다.
『자문을 하게. 그렇다면 자네를 용서해주겠어. 죽은 생도들에게 참회하는 뜻도 될테고.』 장경부에게 박치기를 했던 중년 농군이 콧방귀를 뀌면 빈정거렸다. 그러자 순사가 그에게, 네 놈이 주둥이로 살인을 저지를 놈이라며 아무래도 영창으로 보내야겠다고 차고 있던 수갑을 풀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억하심정이면 저런 말을 하겠냐며 순사를 달래었다.
『아버지가 저를 광에다 가두지 않았더라도 저는 서숙으로 나갔을 테고, 생도들과 함께 병영장으로 달려갔을 겝니다 그때 총을 맞아 죽어도 원한이 없겠고, 감옥에 보낸다면 기꺼이 감옥으로 갔을 겝니다.』
장경부가 수건으로 코피를 닦으며 말했다. 그의 눈에 눈물이 흥건하였다.
『그렇다면 왜 여지껏 코빼기도 안비쳐. 읍내 사람들 앞에 통성 사죄를 해야 도리가 아냐. 죄를 지었으니 한양으로 줄행랑을 쳤고, 숨어 지낸 게지.』
사람들에게 등 떼밀려가며 농군이 말했다.
그 말에 장경부는 머리를 떨구며 대답을 못했다. 그는 아버지 탓으로 병영장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를 못했지만, 이유야 어쨌든 읍내 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워 차마 낮을 들고나설 수가 없었다. 더욱 가르치던 제자 셋이 비명횡사한데 따른 죄책감도 그를 괴롭혔다. 나흘동안 아버지를 상대로 싸우느라 광에서 버티며 금식을 했을게 아니라 제자 셋과 박생원의 빈소라도 방문함이 옳았겠음을 단식에 따른 실신 끝에 깨어나 뒤에야 때늦은 후회가 들었다. 그런 경황이다보니 구치소에 갇힌 분들을 면회 갈 염치도 없었다. 아내의 권유로 대구 처가에서 며칠을 수다 경성으로 올라가 달포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것도 저주스러운 자신을 주체 못한 결과였다.
김원일 최연석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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