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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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 미술계의 당면과제를 얘기할 때면 으레 나오는 것이 비평에 대한 불만이다. 그 불만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여왔다.
한동안 미술계에는 「비평의 부재」현상이 지적되었다.
근대미술 초기부터 60년대에 오도록 미술평론은 평론가가 아니라 작가중 문사취미 내지 기질이 있는 사람이 대신했다.
그 비평의 부재 풍토에 전문적인 미술평론가가 등장하게 된 것은 50년대말 본격적인 한대미술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추상미술운동이 진행되면서 난해한 원리의 미학적 근거를 논하게되고, 숨가쁘게 변하는 서구미술의 신사조를 재빨리 수입해 재빨리 풀어쓰는 풍토에서는 확실히 전문적인 미술평론가가 아니고서는 담당할 일감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생긴 현상이 「비평의 난해성」이었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겠고 또 그렇게 어렵게 써야 본격적인 평론인 것처럼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해독은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가시지 않아 미술평론에는 가위 「난해파」라고 할 계파가 형성된 것도 같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미술붐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위 「주례비평」이라는 새 형식이 만들어졌다. 온갖 형태의 상업적인 전시회의 팸플릿에 쓰여진 서문은 문자 그대로「주례사」에 지나지않는 것이었다.
미술의 상업주의와 결탁된 이 주례비평은 결국 비평의 공정성과 공신력, 그리고 권위까지 송두리째 잃어버린 「들러리비평」밖에 안되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그 비평의 공해는 우리미술계에 높은 치수로 가득차 있다.
그런 가운데 80년대의 비평은 새로운 전환의 기류가 있었다. 평론계의 세대교체는 아니어도 신진평론가들이 미술계 변혁운동과 함께 보여준 면모는 새로운 미술의 이론가이고, 운동가이고, 증언자로서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미술계는 제도권과 비제도권(운동권)으로 갈라지게 되고 평론은 결국 어느한쪽의 편들기, 이른바 당파성을 띠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그상대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크게 보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림양상이며 미술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의 벽이기도한 것이다.
이 벽이 높아지면서 하나는 사회적 리얼리즘에로, 하나는 포스트 모더니즘에로 발전 또는 변전환한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특히 또다른 신진 세대의 등장으로 그 이론은 깊이를 더해가고있다. 그 논리의 정당성을 펴기 위하여 인용되는 서구·동구의 이론서를 나같은 동업자도 미처 따라잡기 힘든 경우가 많을 정도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경우가 수입된 이론에다 미술현상을 꿰어맞추는 억지스러움을 보게 된다. 미술계의 발전, 보다 좋은 예술적 창작을 위해 비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을 위해 미술이 있는 것도 같다.
「있는 것」에서 이론이 추출되지 않고 이론의 틀에 「있는 것」을 집어넣는 것은 「비평의 남용」이다. 지금 미술비평계에 대하여는 『있는 것으로 하여금 말하게끔 하라』는 시대적 요청이 일고 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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