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인문학 선언과 황금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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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많은 젊은이가 출세하기 쉽고 돈 벌기 쉬운 길로 치달려 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런 쏠림 현상은 더욱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까닭에 인문학자들이 고사 직전에 있다고 비탄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1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 121명은 '인문학 선언'을 발표한 바 있으며 26일에는 전국 80여 개 대학 인문대 학장이 공동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동안 대학 교수들이 사회적 전환의 고비마다 정치적 의미의 '시국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한 바 있지만 이번 선언은 학문적 위기의 선언이라는 점에서 새롭다. 여기서 우리는 이를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우선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스스로를 반성하는 지점에서 이 선언의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인문학자들이 전통적인 연구 영역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사회 현실의 변화와 요구가 급변했고, 그 결과 그들이 사회 현실에 등 돌리고 말았다는 비판도 면하기는 어렵다. 인문학자들이 자신들의 전문 영역을 깊이 연구해야 하는 것은 물론 보다 넓은 지평에서 새로운 학문 간의 연구 영역을 확장시켜야 한다.

다음으로 '인문학 선언'이 단순히 더 많은 연구비를 얻어내기 위한 호소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은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도 인문학자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전문 영역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존재 의미를 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자본과 기술의 힘이지만, 그 자본과 기술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자본과 기술만으로 살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치를 느끼면서 살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삶에 참다운 의의를 느낀다. 문학.역사.철학.언어 등이 주축을 이루는 인문학은 그 가치를 상실한 게 아니다. 인문학적 토대가 굳건하지 못하다면 인간은 불안정하고 왜곡된 존재로 전락한다. 인간과 로봇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불화는 모두 인문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최근 우리는 국정을 이끌어가는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상황에 놀라고 있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합의는 없고 오직 오늘의 작은 이익에 골몰하는 소모적 담론만을 양산하고 있을 뿐이다. 그동안 한국이 역사적 정통성을 지켜온 것은 모두 인문 정신의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능주의와 상업주의만으로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나갈 창조성은 우러나오지 않는다. 경제 발전만을 위해 치달려 온 결과 성수대교가 하루아침에 붕괴했고, 과학기술만을 위해 극한 경쟁을 치달린 결과 인문 정신에 의해 배양되는 문화적 풍요로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병든 사회는 파쟁과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 외의 다른 출구를 가질 수 없다.

인류의 역사는 세 가지 사과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 한다. 하나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요, 다른 하나는 뉴턴의 사과이며, 마지막은 세잔의 사과다. 종교와 과학과 예술을 대변하는 이 세 가지 사과는 각각 그 배후에 있는 인간과 세계의 상관성을 말해 준다. 오늘날 우리는 네 번째 사과를 따먹는 새로운 천국을 꿈꾸고 있다. 그 사과는 유전자가 변형된 황금사과다. 이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인문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살릴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이 고사하면 인간은 유전자가 변질돼 과학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거나 부패한 냉장식품이 되고 말 것이다. 인문학이 부재한 사회는 기술 만능과 황금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타락한 천국이 될 것이다.

최동호 고려대 대학원장·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