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총할 놈」(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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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가 초대통감으로 있던 1906년께 서울의 일본인 가운데 미야케(삼택장책)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고려자기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현지에서 그것을 싼값으로 사들여 즐기려고 서울에 온 사람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들에 의한 도굴이 얼마나 우심했던지 미야케는 뒤에 그때의 죄스런 비화들을 엮어 한권의 책으로 내었다.
『그때의 기억­고려고분발굴(도굴) 시대』란 미야케의 회고록을 보면 일본인들에 의한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이 가장 성행했던 것은 이토가 통감자리를 물러난 1909년무렵 부터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이토가 도굴을 얼마나 부추겼는지를 짐작케하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사람(일본인)은 별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이토통감도 그중의 한사람인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점을 넘었다.』
이토는 이렇게 수집한 고려자기 가운데 명품만 1백3점을 골라 저희 국왕(명치)에게 진상했는가 하면 정부내의 실력자나 귀족들에게 도 수십점씩 선물로 보냈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금기로 돼 있었다. 그래서 가장 심한 욕설이 「굴총할 놈」이었다.
이같은 사회윤리 때문에 당시 한국의 지식층 가운데는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진가에 대해 거의 눈뜬 사람이 없었다. 바로 이점을 악용한 것이 일본의 도굴꾼이었고 정상배들이었다. 그들은 무덤에 손대는 것조차 꺼리는 순박한 주민들에게 장통을 들이대며 강제로 무덤을 파게한 것이다.
이렇게해서 일본이 수탈해간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는 고려자기만 해도 현재 약3만∼4만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 박물관과 민간소장의 약2만점에 비해 2배가 넘는다. 따라서 백자나 그림,불상,석물,금속공예품등을 합치면 가위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이다.
신문을 보면 우리나라의 한골동품 중개인이 일본 최대 한국골동품 수집가의 집에 들어가 주인을 위협,국보급 고려청자등 9점의 유물 훔쳐 국내에 들여왔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강탈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었지만,한편으론 그 물건이 원래 우리것이며 또 과거 그들이 저지른 소행을 상기하면 돌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 빼앗긴 우리 문화재를 되찾는 노력이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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