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 진면목 보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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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볼쇼이 개막공연을 보고… 박용구 무용평론가/「사랑과 미움의 대결」 주제 선명/춤ㆍ음악ㆍ무대장치 3박자 완벽
28일 『백조의 호수』로 시작된 소련 볼쇼이발레단의 내한공연은 발레의 거장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30년 가까이 「볼쇼이의 황제」로 군림해온 이유를 대뜸 짐작케 했다. 모스크바 발레학교에서 잘 교육된 풍부한 무용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해서 화려하고 풍성하게 꾸민 그 무대는 솜씨좋은 요리사가 좋은 재료로 훌륭하게 차려낸 식탁이 즐거운 포만감을 선사하듯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4천여석을 꽉 메운 관객들에게 충족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난 88년 처음으로 일부 볼쇼이 발레단원들이 그밖의 소련무용수들과 함께 한국에 와서 발레 하이라이트를 선보였을 때 우리 관객들은 소련의 발레를 엿보게 됐다는 사실에 꽤나 흥분하면서도 「그 유명한 볼쇼이발레의 진면목을 볼 수는 없을까」하는 아쉬움도 컸다. 그런데 이제 볼쇼이극장의 무대장치가 고스란히 옮겨진 무대에서 볼쇼이발레단 무용수들과 볼쇼이극장 전속 오키스트라가 한데 어우러져 볼쇼이발레의 간판이라 해도 좋을 『백조의 호수』 전막을 펼쳐 보인 것이다.
원래 『백조의 호수』는 1877년 차이코프스키 작곡,레이징거 안무로 초연된 이래 여러차례 달라졌지만 1895년 이바노프와 프티파가 공동안무한 작품이 대성공을 거둔 후로는 거의 원전처럼 통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공연된 것은 그리고로비치 특유의 해석을 바탕으로 재 안무된 2막짜리 『백조의 호수』로 볼쇼이 발레의 정석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볼쇼이발레단의 예술감독겸 수석안무가인 그리고로비치는 대가답게 사랑과 미움의 대결이라는 주제를 뚜렷하게 살렸다.
특히 미움을 상징하는 마법사 로트바르트의 역할을 종래의 『백조의 호수』에서보다 크게 강조해 사랑을 상징하는 지그프리트왕자와 한층 치열하게 대결토록 하고 오딜과 함께 여섯마리의 흑조를 등장시켜 백조떼와 강렬하게 대비시킨 점도 매우 특이하다. 또 2막의 마지막 부분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기법이 두드러졌다.
서방세계에서 공연되는 『백조의 호수』에서는 대개 지그프리트왕자와 오데트가 죽은 뒤 물속의 왕국에서 요정들의 안내를 받으며 진주배를타고 영원한 행복의 집으로 간다. 그러나 볼쇼이의 『백조의 호수』에서는 지그프리트왕자의 참된 사랑 덕분에 오데트는 마법에서 풀려남으로써 두사람은 죽음에 이르지 않고 지상에서 행복하게 결합한다.
이같은 현실의 이상화로 일반적인 『백조의 호수』가 짙게 풍기는 서정적 매력은 반감되고 말았지만 그대신 사랑의 승리라는 주제가 더욱 선명해졌다.
전성기를 맞은 두 주역 세미조로바(오데트와 오딜역)와 페레토킨(지그프리트역),주역 못지않은 기량으로 볼쇼이 특유의 남성적 힘과 활력을 과시한 솔리스트 베트로프(로트바르트역)와 샤르코프(광대역)의 빼어난 춤은 이같은 안무가의 작품의도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또 그리고로비치보다 한해 앞선 1963년부터 볼쇼이극장 오키스트라를 지휘해 온 코필로프는 발레와 호흡이 매우 잘 맞는 연주로 이 공연에 풍미를 더해 주었다. 미술감독 비르살라제의 무대장치는 적절히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웅장하게 무대를 꽉 채움으로써 또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검정과 주홍빛과 은빛이 강조된 의상 또한 러시아의 민족적 색채를 드러내면서 무대장치및 조명과도 잘 어우러지게끔 세심히 배려되어 볼쇼이발레의 2백여년 전통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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