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순환출자 금지 재경부도 반대해 곤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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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6일로 취임 6개월을 맞는 '경제검찰 총수' 권오승(사진) 공정거래위원장의 일정표는 요즘 더없이 빡빡하다. 권 위원장은 취임 초 "대그룹 총수들과 만나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최근엔 이들과 비공식적으로 연쇄 회동을 시작했다. 다음 주부터는 언론사 논설위원.경제부장 등과 잇따라 약속을 잡아 놓았다. 취임 초에 비하면 큰 변화다.

순환출자 금지와 출자총액제한 대안을 놓고 점점 논란이 달아오르자 위원장이 직접 발벗고 나선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위원장이 순환출자 금지의 타당성과 출총제 제도의 취지 등을 설파하러 다니느라 하루가 짧다"고 전했다.

당초 권 위원장은 '재벌 규제'보다는 '경쟁 촉진'에 무게를 실었다. "교통질서를 잘 지키려면 도로교통법을 잘 따라야 한다"며 경쟁법 준수를 역설했다. 여러 강연에서도 이를 늘 강조했다. 과거 공정위가 대기업 집단의 지배구조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독과점 해소에 힘쓰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5월 말 지방선거 이후 상황이 묘하게 바뀌었다. 참패한 열린우리당이 "경제부터 살리라"는 여론을 의식하면서 강봉균 정책위의장과 김근태 의장 등 핵심 인사들이 마치 재계의 요구대로 출총제를 곧 폐지할 것처럼 말한 것이다. 이는 '대안 없이 출총제를 폐지할 수는 없다'는 공정위의 입장과는 배치되는 내용이다. 권 위원장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초 권 위원장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주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출총제를 폐지하더라도 순환출자는 계속 규제해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것이다. 이 한마디에 출총제를 둘러싼 논점이 순환출자 금지로 전환됐다.

이에 대해 재계는 "순환출자 금지는 대기업 그룹을 해체하라는 소리"라며 여전히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최근엔 이웃한 경제부처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정경제부 김석동 차관보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기업을 규제하는 일을 하면 남들이 쳐다봐 주니까 폼나는 것을 하려는 것 아닌가"라며 비꼬기도 했다. 재경부로서는 공정위가 추진하는 순환출자 금지 조치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여준 것이다.

골치 아프고 점점 꼬여가는 순환출자 문제와 달리 권 위원장은 조직의 '내치(內治)'에선 점수를 받고 있다. 경쟁법 권위자답게 날카로운 지적으로 국장들을 꼼짝 못하게 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는 또 법.경제.경영학을 아우르는 복잡한 공정위의 업무 특성상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며 직원들에게 더 분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 결과 공정위 안에선 경쟁법연구회 등 학습동아리가 대거 조직돼 공부하는 사무관.서기관이 많아졌다. 로펌에서 일하던 민간 전문가들을 송무팀장과 심결지원2팀장 등에 기용하는 등 조직에 자극을 준 것도 그가 이끈 변화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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