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표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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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사랑이 가버릴 때 항상 정의가 존재한다. 정의가 가버릴 때 항상 무력이 존재한다. 무력이 사라질 때 항상 엄마가 있지. 엄마 안녕, 하하하하…. 나를 안아줘요 엄마. 당신의 긴 팔로, 당신의 자동 팔로, 당신의 전자 팔로….』
미국워싱턴의 허시혼 박물관겸 조각 전시장에서「문화와 그 해설-80년대 조망」이란 주제로 열리고있는 행위예술제에서 로리 앤더슨은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다.
공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시이기도한 행위예술에서 앤더슨은 20세기말 부조리한 사회를 상징하는 갖가지 해프닝을 벌이고 있다.
「알에서 갓 깨어난 듯한 병아리 머리카락」모양의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앤더슨이 여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음산한 에코 섞인 목소리가 갑자기 찢어지는 비명을 지를 때만 여성적인 면을 엿 볼 수 있는 그녀는 유니섹스의 화신처럼 등장한다.
앤더슨은 영화상영용 스크린을 자신의 몸짓을 그려내는 캔버스로 삼아 다양한 알레고리를 연출해낸다.
그녀가 표현해내는 대상은「인간에 의한 인간의 파괴」로 ▲소련 체르노빌과 인도 보팔의 참사 ▲팝 가수 마돈나로 대표되는 물질주의 ▲AIDS와 마약 ▲기상이변을 낳고 있는 대기오염 ▲현대인 의식전체를 획일화시키고 있는 저녁TV뉴스 등이다.
비디오로 상품화되어 널리 알려지게 된 앤더슨의 행위예술 작품『오! 슈퍼맨』도 이번 공연에서 반복 연출되고 있다.
쥘 마스네의 오페라『르 시드』에 나오는 테너 아리아에서 따온 『오! 슈퍼맨』에서 앤더슨은「사랑·정의·무력」이 사라진 곳에서 「엄마」를 부르짖고 있다.
한편 이 행위예술의 공연장은 객석마저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섬뜩한 장면이 지나가는 무대를 응시하고 있는 관객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는 회백색 대리석 벤치에 새겨져 있는 냉소적인 글귀들을 피할 수 없다.
앤더슨과 함께 공연하고 있는 제니 홀저가 만들어 낸 이 문장들은 대리석 벤치의 옆·앞·뒤 여기저기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당신은 타인에게 상처를 줘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있다』『당신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정직하게 남아있는 비결이다』『전쟁은 순화 의식이다』…
허시혼 전시장의 행위예술에서 앤더슨과 함께 주목받고 있는 작품은 그녀의 동료 로버트 가비와 셰리 레빈이 만들어낸 『걸려 있는 남자/졸고있는 남자』라는 그림이다.
미국사회의 인종적 편견을 묘사하고 있는 이 그림은 졸고 있는 백인 남자와 린치 당하고 있는 흑인 남자를 그리고있다.
이 그림은 백인에게 「백인들은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흑인에게는「백인이 흑인을 린치 하는 꿈을 꾸고 있다」는 의식을 상기시켜주는 기묘한 조명조작으로 행위예술이 되고 있다. <채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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