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포럼] 한나라당이 먼저 알몸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어느 나라나 야당이라면 대개가 여당보다 국회의원 숫자가 좀 모자라거나 아니면 아예 턱없이 적은 정당을 연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국회의원 재적 과반수보다 12석이나 더 많은 1백49석의 한나라당이라는 야당이 있다는 것을 외국인이 안다면 아-꽤 인기있는 정당이겠구나 하고 오해하기 쉽다. 실제는 그렇지 못하니 한나라당의 존재란 아무래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정치 전문가들이 숱한 이유를 나열해 정황을 설명하지만 결국은 그게 무슨 거대 야당이냐, 국민을 리드하지 못하는 군소정당이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을 둘러싸고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거나 그들의 무능한 행정이 도처에서 잡음을 빚어도 야당 지지도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나라당의 절대적 지지층인 50대 이후 세대들조차 盧대통령의 재신임을 묻는 투표에 찬성표를 던지겠다는 뜻을 밝힌 일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야당에 무슨 비전이 있기나 하는지 마음이 착잡해진다.

지난 두차례의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하고도 한나라당엔 변화의 조짐이 없다. 복잡한 당내 사정은 그들의 문제다. 현 정권이 죽을 써도 한나라당이 대안 세력으로 떠오르지 못한다. 여당이 형편없으면 야당이라도 잘 해서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일 것이다. 그런데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야당이 '거대'의 둔한 몸집으로 웅크리고만 있으니 국민의 눈에 하찮게 보일 뿐이다. 한국인은 지지리 복도 없는가 보다.

길게 보면 우리들은 언제나 낙관적인 삶을 이어왔다. 국민이 정치를 끌고 가고 경제가 정치를 끌어올렸다. 고통 속에서도 국력은 끊임없이 신장했으나 정치와 검은 돈의 거래가 발전의 걸림돌이 됐다. 지난해 말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힘입었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대선 후 밀려온 권력의 파도와 돈벼락에 이성을 잃어' 우리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부패척결을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한나라당은 지금 어떤 꼴인가. 더 이상 최돈웅 의원의 SK 비자금 1백억원 수수 의혹 등을 감쌀 일이 아니다.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이 각종 부패의혹으로부터 벗어나 알몸으로 국민 앞에 다가서야 야당이 대안세력으로 지지받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천만번 옳은 말이다. 원내총무와 대선기획단 위원으로 일한 바 있는 李의원 자신부터 알몸이 되고 소문 속에 싸인 다른 야당의원들도 이 대열에 선다면 현 정권과 한판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에서 횡행하고 있는 차명계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안기부 계좌를 통한 자금세탁 의혹 등도 털어버리고 이미 내건 정치자금 실명제 도입 공약도 구체화시켜 수권정당으로서 한나라당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바란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은닉 비자금이 차명계좌에 가려져 있었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들 및 그 측근들과 관련된 비자금 역시 차명계좌를 도피처로 삼았다. 현재 입소문이 나있는 청와대 실세나 주요 여야 정치인들이 몰래 거래하고 있는 수많은 차명계좌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현행 실명제법 하에서 많은 장벽이 도사리고 있다. 사정기관이 차명을 단속할 수 있도록 조사권을 강화한다면 오히려 야당이 탄압받을 거라고 아우성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진정 벌거벗은 모습으로 국민의 심판을 받고자 한다면 이거야말로 '도덕성도 없고 무능한' 현 정부의 대안세력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각오없이 또 무기력한 정당으로 가겠다면 그대로 갈 일이다.

최철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