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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지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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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상이 어지러울 때 선인의 지혜와 안목을 구함은 당연한 일이다. 고(故) 조지훈(趙芝薰) 선생의 '지조론(志操論)'을 다시 펼쳐 읽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지조론'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론'이 씌어진 지 반세기가량이 지났지만 오늘날에 와서 지조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하지만 얼마 전 교육부총리로 내정돼 다음주에 국회 교육위원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김신일 서울대 명예교수에 대해서만큼은 평생을 존경받는 학자로 살아온 분이라 지조 있는 모습을 기대하고 싶다.

그런데 정작 김신일 명예교수가 교육부총리에 내정된 직후 보여준 모습은 그 기대감을 혹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그는 지난 5일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가 주최한 한 세미나에서 '한국의 미래교육 비전과 전략'이라는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육부총리에 내정되자 지난 3일 주제발표를 취소했다. 그러나 이미 원고는 인쇄를 마친 상태였고, 그 원고에는 노학자의 소신이 짙게 배어 있었다.

김신일 명예교수는 그 원고에서 한국 교육의 근본 문제를 세 가지로 짚었다. 첫째는 국가주의적 통제정책으로 인한 교육의 경직된 획일성이다. 둘째는 교육투자 정책의 실패로 인한 교육여건의 빈곤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런 비정상 상태가 장기간 지속된 데 따른 교육자들의 교육정신 상실이다. 심지어 그는 개혁이 개악으로 흘렀다고도 했다.

그는 세계은행의 한국 교육에 관한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정부가 학교 형태는 물론 입학, 교육 과정, 교사 임용, 입학금.수업료와 교과서 채택 여부까지 일일이 규제하는 교육시스템 전반에 대한 통제가 교육을 경직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국가 통제의 경직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월성도 평등성도 모두 죽었다고 질타하며 학교의 다양화, 교육과정 운영의 유연화가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한마디로 김신일 명예교수의 미발표 원고에 담긴 학자적 소신은 참여정부의 획일적인 평등주의 교육관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바로 이런 사실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자 지난 4일 김신일 내정자는 교육부 기획홍보관리관의 입을 통해 "(참여)정부의 정책기조와 나의 교육정책적 생각은 기본방향에서 일치한다"고 애써 밝혔다. 그러고는 "학자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조건 없이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과 구체적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뜻도 피력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원고 내용을 비롯해 그간 김신일 명예교수의 생각이 참여정부의 정책기조와 기본방향에서 일치한다고 볼 여지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그가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소장 학자였다면 모를 일이지만 그는 지난 2월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한 완숙할 대로 완숙한 교육계의 원로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소신과 정책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나 신중함의 발로가 아니다. 세간의 눈, 상식의 귀로는 그것이 지조 없음으로 보이고 들릴 수 있다.

조지훈 선생은 '지조론'에서 말하길 "사람을 보려면 다만 그 후반을 보라"고 했다. 이제 김신일 교육부총리 내정자의 진짜 생각과 소신이 무엇인지 인사청문회를 통해 지켜볼 차례다. '지조'를 생각하며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