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시인 기형도 시마다 『젊음의 정직성』가득 | 1주기 맞아 재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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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내 삶 곳곳에 미리 숨어 있다가 갑자기 악수를 청할 당혹한 그 절망의 정체를 나는 희망이라고 불러온 것은 아니었는지. 아아, 목구멍 가득히 안개가 들어찬 느낌이다.』89년3월7일, 희망과 절망사이를 분주히 오가다 목구멍 가득 안개에 막힌 듯 29세의 젊은 시인으로 저 세상으로 떠난 기형도. 그의 1주기를 맞아 문학과 삶을 재조명하고 추모하는 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동료문인들과 유가족이 기 씨의 유고를 정리,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도서출판 살림간)을 펴냈는가 하면 그가 참여했던 시동인「시운동」은 6일 밤 서울 혜화동 시문화회관에서 추모행사를 가졌다. 또「시운동」을 중심으로 그의 시를 아끼는 문인들은 처녀시집을 대상으로 한 기형도 문학상을 제정, 이 시대의 한 요절시인을 기릴 예정이다.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난 기 씨는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 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해 정치부·문화부·편집부 등에서 일했다.
고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대학시절 대학문학상인 「박영준문학상」소설 부문,「윤동주문학상」시 부문을 수상할 만큼 자질을 보인 그는 85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그후 4년여의 짧은 문단생활동안 문예지에 40여 편의 시를 발표하며 90년대를 향한 주요시인으로 떠오르다 요절했다.
타계 직후인 89년5월 그가 남긴 총61편의 시를 모은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 지성사간)이 출간됐다. 이 시집은 발간 즉시 정통 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주요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지금까지 3만여 부가 팔려나가 시단의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의 시가 이렇게 많은 독자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그의 시 세계의 독특성과「젊음의 정직성」때문이라는 평이다.
이번에 간행된 산문집『짧은 여행의 기록』에도 그의 짧았던 젊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3부로 구성된 이 산문집은 여행기·일기·편지·단상·소설·콩트·서평·기사 등을 모았다.
1988년 8월2∼5일 그의 생애 마지막 짧은 여행을 기록하고 있는 여행기는 그의 삶과 문학이 하나임을 보여준다.「희망」을 찾아 일상을 탈출, 홀로 여행에 나섰다가 「희망」이란 결국「스스로 변화하는 통속적 의지」가 아니겠느냐며 일상으로 다시 스며든다.
그러나 기 씨의 순수한 젊음의 혼은 통속적 의지로 일상에 편입되지 못하고 요절로 남고 말았다.
환상의 실체, 소외, 혹은 유년의 기억 등을 다룬『환상일지』『미로』『영하의 바람』등 단편소설들은 환상적 문체와 완결성 등으로 그의 소설가로서의 재능도 확인케 해 준다.
또 사소설적 성격을 띠고있어 그의 난해한 시적 이미지 추적에도 도움을 준다. 주어와 목적어, 그리고 술어사이의 정확한 거리, 쉼표 하나 하나에까지의 세심한 배려 등 그의 서평과 기사에서는 타인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한 완벽주의자의 글쓰기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유고를 정리, 이번 산문집을 펴낸 기 씨의 누이 기애도씨는 『유난한 결벽증에 완벽주의자인 동생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이 글을 공개하는 것이 망설여진다』고 서문에 적고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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