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나치전범 후손의 고뇌 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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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은 그리스 출신이다.
영화『뮤직 박스』를 보노라면 그리스 신화 안티고네의 비극이 떠오른다.
눈 먼 죄인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끝까지 봉양하다 죽음에 이르는 안티고네.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푸스왕』은 파멸을 마다 않는 핏줄의 성선을 그리고 있다.
『뮤직 박스』는 법과 정의, 역사와 심판, 양심과 용기를 주제로 삼고 있지만 바탕에 흐르는 것은 한 가계의 안티고네적 비극이다.
평화로운 가정에 느닷없이 날아든 나치의 망령.
아버지가 나치전범으로 고발당한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변호사인 딸이 전력을 다해 변호, 무죄를 이끌어 낸다.
그러나 딸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뮤직 박스 속에는 아버지의 짐승만도 못한 과거가 낱낱이 들어 있었고 딸은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고발한다.
이 영화는 현대 서구의 원죄로 남아있는 나치문제를 피해자 아닌 가해자 쪽에서 살피고 있다.
『홀로코스트』등 피해자인 유대인의 비극을 다룬 영화가 나치의 잔학상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비해 『뮤직 박스』는 가해자의 고통받는 양심, 그 후손들의 원죄와도 같은 업보를 보여주고 있다.
「최고의 할아버지」가 실은 나치의 짐승이었다는 진실을 알게 될 때 그 손자의 상처받은 영혼은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을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는 이 점에서 과거의 비극을 인류 보편적인 휴매니티 측면에서 파악하고 영화화에 성공했다.
전후 미국은 뉘른베르크에서 전범재판을 하는 한편 나치의 정보망과 정보요원을 공산당을 잡는데 이용했다고 한다. 전범중 상당수가 미국 정보기관에 고용됐고 그들은 미국에서 아무 탈 없이 정착할 수 있었다.
국익을 앞세운 이러한 미국의 「합법적 범죄」가 『뮤직박스』와 같은 소재의 비극을 예비했었고 이점에서 얼핏 해방 후 한국의 친일파 득세가 떠오른다. <이헌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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