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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쿠엔틴 타란티노 신작 '킬 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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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호장룡'과 '매트릭스'이후 할리우드에서는 동양의 액션을 흡수하는 게 유행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40)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킬 빌-vol.1'은 이런 유행을 따르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경지를 더하고 있다.

'와호장룡'식의 우아하고 날렵한 와이어 액션 대신 일본도(刀)와 선혈이 난무하는 사무라이.야쿠자 액션이 등장하고 여기에 수십명을 혼자 해치우는 홍콩영화식 액션을 버무려 일찍이 할리우드에서 찾아볼 수 없던 무협 영화로 탄생시켰다.

예산과 촬영 분량이 예상보다 크게 늘면서 제작사의 요청으로 영화를 1.2편으로 나누는 산고는 거쳤지만 이달 초 미국에서 개봉한 1편은 첫 주에 흥행 1위를 차지하는 성적을 냈다. 그 때문일까. 지난 19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타란티노의 말투는 자신의 영화만큼이나 혈기충천했다.

'킬 빌(Kill Bill)'은 결혼식장에서 폭력 조직의 총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4년 만에 깨어난 킬러의 복수극이다. 타란티노의 말마따나 '킬 빌'의 새로운 맛은 동양식 액션과 중간에 삽입된 10여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등 그가 열광하는 온갖 장르를 한데 뒤섞은 비빔밥(그는 stew,즉 잡탕국으로 표현했다)에서 나온다.

예컨대 우마 서먼이 88명과 맞서는 대결은 홍콩 쇼브라더스의 고전적 스타일, 고교생들의 무한대결을 그린 일본영화'배틀로얄'에 여고생으로 나왔던 배우가 같은 차림으로 철구(鐵球)를 휘두르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막판에 눈밭에서 루시 리우와 우마 서먼이 벌이는 칼싸움은 스파게티 웨스턴과 전통 사무라이 액션에서 따왔다.

'킬 빌'은 액션을 구사하는 주인공들이 우마 서먼을 비롯해 루시 리우.줄리 드레퓌스.비비카 폭스 등 모두 여배우들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조직의 두목 빌은 1편에서는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 여자 검객은 미국 관객에게는 새롭겠지만 홍콩이나 일본 액션물에서는 흔한 일이며 거기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에도 '에일리언'시리즈의 시고니 위버나 '미녀삼총사'같은 여성 액션물이 있었지만 무자비하고 잔혹한 '킬 빌'과는 그 맛이 완연히 다르다. 그는 '킬 빌'의 여성들은 성적 매력과 귀여움으로 무장한 '미녀삼총사'류와는 달리 "누구에게 허락받지 않고 스스로 강인해진 전사"라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킬 빌'이 동양 액션을 그저 베끼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타란티노는 "홍콩 무협영화의 단점은 싸움 장면이 단조롭고 너무 길다는 것"이라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영화 후반부 일본 술집에서 벌어지는 대결의 경우 "장면을 나눠 각각 다른 스타일,다른 시각효과를 보여 주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주요 액션 장면들은 중국 베이징의 세트에서 무술 감독 원화평이 맡아 촬영했다. 하지만 1편에서는 일본 액션물의 분위기가 보다 도드라져 보인다. 대사도 타란티노 특유의 독설은 줄어 들고 일본어 대사가 적잖이 나온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이유를 알 만하다.

"올해 초 73세의 나이로 타계한 일본 야쿠자 영화의 거물 후카사쿠 긴지를 존경하며 그의 마지막 작품 '배틀로얄'이 이번 영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후카사쿠 긴지 감독과는 92년 '저수지의 개들'홍보를 위해 일본에 들렀을 때 대담을 나눈 뒤로 10년간 우정을 나눈 사이"라며 "'킬 빌'의 제작 과정에서 시나리오에 일일이 도움말을 적어 주었다"고 회상했다.

타란티노는 데뷔작 '저수지의 개'는 물론 '펄프 픽션'(94년)'재키 브라운'(98년) 등에서도 정도 이상의 폭력 장면이 많아 '헤모글로빈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피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런 장면이 흥미롭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런 장면들은 관객에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 영화라는 점을 더 확실하게 각인시켜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쿄=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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