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강도 맞아 기억상실 50대/정신병원서 “생고생 석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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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경찰ㆍ병원측 “번거롭다” 신원조회 한번도 안해/가장 잃은 가족들 「집념의 수소문」으로 찾아내
『경찰과 병원중 어느 한곳에서 조금만 성의를 가졌더라면 생사람을 3개월씩이나 정신병원에 가둬두지 않았을 겁니다.』
23일오후 전국을 헤맨끝에 서울 응암동 시립동부병원에서 아버지 이용남씨(59ㆍ미장공ㆍ서울 전농2동 152의3)를 가까스로 찾아낸 장남 이철호씨(33ㆍ건축업)는 분통을 터뜨렸다.
성실한 미장공으로 3남2녀를 둔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이씨가 어처구니없는 비극을 겪게된 것은 지난해 11월20일.
오후5시쯤 『동료 이영하씨(38)와 술한잔 하겠다』며 옷을 갈아입고 나간뒤 가족들과 연락이 끊겼다.
이씨가 경찰에 발견된 것은 이날 오후10시35분 서울 전농2동 동명식품앞.
『어떤 남자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는 주민신고를 받은 청량리경찰서 전곡파출소에서 순찰차에 인계,동부시립병원으로 옮겼다.
이씨는 나이보다 젊게보여 파출소근무 일지에는 「45세가량의 행려자」로 기록 됐을뿐 신원확인을 위해 지문조회 등 보호자를 찾는 일은 생략됐고 노상강도를 당한 것으로 보였지만 보호자가 없으니 수사를 벌이지도 않았다.
응급치료를 받고 입원,의식을 회복한 이씨가 기억상실증세를 보이자 병원측은 지난해 12월3일 응암동 시립동부병원으로 인계했다. 물론 병원에서도 신원확인절차는 무시됐다.
하루 이틀 애타게 기다리다 못한 이씨가족은 함께 술을 마신 이씨로부터 『별로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로 헤어졌다』는 말을 듣고 혹시 친구나 친지집에 훌쩍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친하게 지냈을 만한 친구 10여명을 일일이 찾아가 행방을 물었고 고향인 강원도 춘성까지 내려갔다.
또 철호씨는 집에서 가까운 전곡파출소에 세번씩이나 가 만약 이씨가 파출소에 들어올 경우 어디로 옮겨지게 되는지 알아본뒤 병원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실종 1주일후인 지난해 11월27일 철호씨는 시립동부병원을 찾았다.
사고당일 일지를 뒤지다 청량리경찰서 문영찬경장이 성명 미상의 45세 남자를 인계했다는 기록을 찾아 냈지만 60세 노인을 45세로 착각할리 없다는 설명에 아버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장남 철호씨와 2남 창선씨(26ㆍ운전사)는 회사측의 양해를 얻어 1주일에 이틀씩 응암동 갱생원과 중곡동 정신병원 등 시울시내 10여개 병원ㆍ양로원ㆍ갱생원을 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은 곳을 두세차례씩 찾았으나 허사.
결국 철호씨는 22일 시립동부병원에서 지나쳤던 45세 남자의 이름을 병원에 조회한 결과 그동안 의식을 되찾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낸 이씨를 찾아냈다.
기쁜 마음에 병원을 찾아간 철호씨는 또다른 벽을 만났다.
3개월치 치료비 1백만원을 내지 않으면 면회도,전화통화도 절대금지라는 것이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치료비를 마련,23일 아버지를 되찾은 철호씨는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냈는데도 병원측에서는 이를 경찰에 통보해 보호자를 찾아주는 작은 수고마저 해주지 않았다』고 흥분했다.
한편 청량리경찰서측은 『행려자가 하루에도 4∼5명씩 되는데 어떻게 일일이 지문조회를 할수 있겠느냐』고 해명,경찰과 시립병원의 무성의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족을 지척에 둔채 생이별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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