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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아침] '해변의 발자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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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해변의 발자국'- 유홍준(1962~ )

얼마나 무거운 남자가 지나갔는지

발자국이, 항문처럼

깊다

모래 괄약근이 발자국을 죄고 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 똥구멍처럼, 오므려져 있다

바다가 긴 혓바닥을 내밀고

그 남자의

괄약근을 핥는다

누가 바닥에 갈매기 문양이 새겨진 신발을 신고 지나갔을까?

나는 익사자의 운동화를 툭, 걷어찬다

갈매기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른다



철 지난 바닷가에 가보면 비로소 인간의 풍경이랄 만한 것들을 만난다. 인간들 사라진 후에야 진짜 인간의 풍경이다. 공허해 이길 방법이 없다. 온갖 허무들만 모여들어 헌 신짝, 속옷 나부랭이들, 침들, 신음들 소리 없이 먹어치우느라 분주하다. 저것이 우리들의 사후(死後)라면… 몇몇 죽음도 파도는 금방 꿰매버리고 말지 않던가.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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