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성] 비단길에 흐르는 千의 음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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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음악과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은 20세기초까지만 해도 매우 도발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양의 예술음악이 모든 음악을 판단하는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비교음악학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민족음악학도 처음엔 서양음악을 중심에 놓고 다른 문화권의 음악을 비교하면서 그 원시성과 비예술성을 밝히는 작업이 주류를 이뤘다. 이처럼 편협한 서양 중심적 시각이 수정되기 시작한 것은 민족음악학에 비서구권 출신 학자들이 대거 동참하면서부터다. 서양의 예술음악도 세계의 다양한 음악 중 한 범주에 불과하다는 인식에까지 이르렀다.

이 책의 저자 전인평은 주로 국악기를 이용해 작품을 쓰는 작곡가인 동시에 한국의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국악학자이기도 하다. 또 국내 몇 안 되는 인도음악 전문가다. 1985년 인도에서 현장연구를 시작으로 20여년간 계속된 실크로드 음악기행 편력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책은 오아시스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의 두 길로 다다를 수 있는 아시아 각국에 사는 민족들의 음악과 문화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여정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중국과 일본에서 시작하여 가 보기 쉽지 않은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이어진다. 그 지역의 음악과 문화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중간 중간 삽입된 컬러 사진과 깔끔하게 편집된 책의 구성은 독자들에게 세계 음악과 문화, 더 나아가서 그 음악이 담고 있는 정신세계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가령 몽골에서는 찰현악기(활로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현악기)가 주술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여자들은 이 악기를 연주할 수 없다든지, 동물의 울음소리나 새소리.물소리를 흉내내는 것도 음악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저자는'음악'하면 으레 자기네 전통음악을 가리키는 인도와 일찌감치 서양 음악에 안방을 내준 우리나라를 비교하면서 우리 현실에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다른 나라의 음악에 깊이 빠져들수록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더욱 절감한다는 대목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의 연구가 민족음악학의 학문적 바탕 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아직 학문적 검증을 받지 않은 대목이 더러 보인다는 것이다. 예컨대 라가(인도의 전통음악)와 '영산회상'이 닮은꼴이라든지 거문고의 할아버지는 비나(인도의 현악기)라는 주장은 그 타당성에 대한 연구가 좀 더 깊이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독자들에게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을 제공하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간의 역사적.문화적 관계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이 아직까지도 서양의 예술음악만이 최고라는 편견이 팽배한 국내의 사회적.교육적 현실에서 음악적으로 넓고 열린 시각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변계원<음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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