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여유가 아니라 삶의 존재 가치 예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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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우복(70)씨는 대우그룹 창립 멤버로 '소문나게' 일했던 경영인이다. 대우가 손꼽는 기업으로 크기까지 안살림을 도맡아 '대우의 어머니'라 불렸다. 하지만 문화계에서는 '소문 안 나게' 미술품을 모은 애호가로 더 인정받는다. 전문가가 혀를 내두를 만큼 미술품 알아보는 눈이 좋아 '타고난 안목'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배탈이 나지 않고는 화장실에도 편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전력투구 30년이 대우 그룹 붕괴로 끝났을 때, 그는 빈손으로 회사를 나서며 인생에서 처음 자유를 얻었고 이 책을 썼다. 피똥 싸게 일하던 시절, "어둡고 긴 터널 저편 아득한 출구의 빛"이자 "가까스로 찾은 숨구멍"으로 그를 살리던 미술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의 예술은 단순히 여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아귀다툼 같은 사회생활에서 유일한 존재가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지금은 내 삶의 전부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한다. 안방에서 거실로, 이제 나는 나를 만나러 간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내 인생에 남은 '사랑의 힘'" 미술품이다. 새색시 같은 백자 연적부터 고향집 닮은 산수화까지 그가 사랑한 미술과 사람 얘기가 칠십 평생과 엮여 구구절절 풀려나온다.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었다. (…) 늘 그렇듯 먼저 문갑 위의 달항아리에게 시선을 옮겼는데, 그 자태가 몹시 장엄하고 황홀하였다. 순간 벌떡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항아리는 감히 범접하기 힘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우복 소장품'의 백미는 무덤에 넣던 명기(明器)다. 그는 명기에서 이름없는 도공의 마음을 본다. "가마 속에서 붉은 불꽃이 파랗게 변하는 순간, 이 작은 영물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영원불멸의 혼백을 부여받게 되었음직하다."

한학자인 청명 임창순 선생이 그에게 준 호는 소운(紹芸), '김매기를 잇는다'는 뜻이다. 김매는 마음으로 사는 그에게 맞춤한 말이 있다. '뛰어난 애호가는 말 없는 미술사가'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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