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경제는 함께 가야한다/이종대 비상임 논설위원(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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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치와 경제의 동반발전은 세계의 모든 개도국들이 추구하는 국가적 목표이면서도 전후 이러한 위업달성에 성공한 개도국은 좀체 찾아보기 어렵다. 인도를 비롯한 극소수 국가들이 정치적 민주화에는 상당한 진전을 이룩했으면서도 경제적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버마와 아프리카의 다수국가들처럼 정치와 경제의 양쪽이 저개발의 수렁에 오래 빠져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국ㆍ싱가포르ㆍ대만 등 이른바 아시아 신흥공업국들은 장기간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해왔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1인통치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참다운 민주주의를 가꿔나가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있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선발개도국들이 선진권 진입의 문턱을 넘지 못한채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것도 둘중의 하나,특히 정치발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정치와 경제의 두발이 모두 성해야 간신히 뛰어넘을수 있을 정도로 선진권 진입의 문턱은 높기만 한것이다.
개발도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와 경제의 안정과 불안정,진보와 퇴영에 관한 사례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제공해주면서 동시에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발전 사이의 상호의존관계를 극적인 사태전개로 보여주는 대륙이 라틴아메리카다. 이 지역의 80년대 드라마는 그러한 사례들로 가득차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80년대는 민주화의 진일보와 경제의 기록적 퇴보로 특징 지워진다. 지난 10년간 이지역의 민주화 과정은 눈사태 현상을 방불케 했다. 80년대 벽두에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한 국가가 단 2개 뿐이었던 남미대륙에서는 80년대말에 이르러 칠레와 파라과이를 빼놓고는 모두 군사독재를 청산했다. 그나마 칠레에서는 88년의 국민투표 결과 피노체트 정권의 집권 연장이 거부되었다.
선거에 의한 민간정부의 연속적 출현이 정치적 희망을 확산시켜가고 있는 동안 경제적 파탄과 좌절감이 전 지역을 휩쓸었다. 경제발전의 긴 과정에서 라틴아메리카의 80년대는 흔히 「잃어버린 연대」로 불린다. 차라리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그런 시절이라는 뜻이다.
80년대 끝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여러국가에서 70년대말보다 줄어들었고 주요국들이 세자리 수의 초인플레를 겪었는가 하면 분배구조는 더욱 악화되고 민생고의 가중이 약탈과 폭동을 촉발하기도 했다. 많은 국가들이 군사정권하에서 상대적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60년대 및 70년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시기가 80년대의 10년이었다.
90년대의 라틴아메리카가 아직은 연약한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위독상태의 경제를 회생,발전시킬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 대부분 온건하고 여리기만한 민간정부들 앞에 산적해있는 정치적ㆍ경제적 과제들은 결코 평탄할수 없는 앞길을 예고해 주고있다. 민간정부에 걸린 국민들의 기대는 비현실적으로 크게 부풀어 있으며 도처에 불안요소들이 잠재해 있는 가운데 일부 국가에서는 군부의 정치개입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고있다.
중남미의 80년대사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교훈은 근대화가 어느정도 진전된 단계에서는 정치와 경제 어느 한쪽의 발전수준이 다른쪽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60∼70년대의 정치적 저개발이 80년대의 경제발전에 족쇄를 채웠고 이것은 다시 90년대의 정치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 악순환의 차단없이 정치와 경제의 지속적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게 돼 있다. 정치와 경제는 「3각의 2인」처럼 나란히 나아가야지 어느 한쪽만이 홀로 앞질러 갈수는 없는 것이다.
지구의 정반대쪽에 있는 우리의 사정도 크게 다를바 없다. 정치와 경제의 동반발전은 90년대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민족적 과제로 내걸만한 것이다. 이 과제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발전된 민주주의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는 당위론과도 결부되어 있다. 빠른 근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양산된 사회갈등을 계속 억누르거나 뒷날로 미루지 말고 민주화된 정치제도가 제때에 질서있게 조정ㆍ해소해주는 일이야말로 정치­경제의 동반발전을 위한 핵심적 과제중의 하나다.
이것은 정치발전론자들이 말하는 분배의 위기,참여의 위기,일체감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일을 본격화 해야할 새 연대의 벽두에 우리앞에 갑자기 불어닥친 것이 정계개편의 회오리다. 따라서 당연히 제기되는 물음은 정치권의 시대적 과제를 수행함에 있어 정계개편이 얼마나 필요하고 또 얼마나 유익한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개편 주체세력이 앞으로 정치가 수행해야 할 「일」의 체계를 규명하고 그 최선의 현실적 추진방법으로서 개편이 불가피함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개편 반대론의 개진도 같은 논리전개 방식을 갖출때라야 더큰 설득력을 지닐수 있을 것이다.
개편과 맞물려 진행되는 정치권의 또다른 변화는 정치의 엄청난 비대화다.
거대여당에 대응하여 추진되는 평민당의 당세확장,신야당 출현의 가능성,그리고 지자제 실시로 새로 탄생할 수만명의 정치활동 인구는 우리나라 헌정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기록적인 정치권 팽창을 초래할 것이다.
정치인원,정치집회와 각종 정치행사의 빈도,거기에 동원된 비정치인의 수,정치자금과 정치비용,정치바람,정치입김의 대폭적 팽창을 예상케하는 이 양적 확장이야말로 정계개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함축하는 변화임에 틀림없다.
정계개편으로 정치권의 면모가 일신되고 정치에 돌려지는 국가 자원의 몫이 대폭 불어나는 만큼 국가발전을 위한 정치권의 역할도 새로워지고 증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워지고 증대된 역할은 정치­경제의 동반발전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는데 바쳐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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